‘2016 푸마 이그나이트 서울’이 5월 15일 기록적인 악천후 속에 치러졌다. 이날 서울엔 2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고 강풍도 몰아쳤다. 마라톤을 하기엔 주최 측에게나 참가자에게나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어쨌든 1만여 러너들의 레이스는 예정대로 큰 무리 없이 진행된 듯 보였다.

그러나 대회 후 온라인상에 나타난 참가자들의 반응은 거칠었다. 이그나이트 공식 블로그에는 대회 현장 곳곳에서 겪은 고생담이 속속 올라왔고, 미흡한 운영에 대한 항의의 글도 쏟아졌다. 개중에는 주최사인 푸마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불매운동을 시사하는 글까지 있었다. 월요일 오후부터는 여러 언론사가 대회의 부실 운영을 성토하는 기사들들 토해내기 시작했고, 주최 측은 결국 오후 6시경 단체 문자를 통해 참가자 전원에게 참가비 절반을 환불하겠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이미 실행된 마라톤대회가 대회 후 환불을 실시하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블로그 게시판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강경한 비판과 불만의 글들이 올라왔다. 50%로는 부족하니 100% 환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참가비 환불만이 아니라 추가로 피해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주최 측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글이 게시되면, 성난 참가자들은 해당 글을 올린 참가자를 ‘주최 측이 고용한 알바’라고 단정 지으며 거친 댓글로 공격했다.

대회 후 4일이 지난 지금도 게시판 여론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그나이트 주최 측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참가자들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가혹한 매질을 가하는 것일까? 일단 그날의 상황을 시간순서대로 복기해보자.

#폭우 속 1시간 이상 대기한 주자들…고달픈 레이스의 전초전

출발 대회장인 홍대주차장거리는 점심 이후부터 붐비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짐을 맡기고  대회장의 각종 부스를 이용하려던 참가자들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했다. 대회 전 이벤트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참가자들은 가게 지붕 등을 찾아들어가 비를 피하기 바빴다.

물품보관차량이 운영을 마치고 도착 대회장으로 출발한 4시 이후에는 주최 측이 나눠준 우의에 의지해서 비와 바람을 견뎌야 했다. 적지 않은 참가자들이 이 때부터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의가 너무 허술하다는 불만도 있었고, 일부 참가자는 우의를 지급받지 못했다는 항의도 나왔다. 주최 측은 수량이 부족하지 않게 우의를 준비했으나 정교하게 배포하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해명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4시 이후 출발할 때까지 제대로 스트레칭 및 워밍업 타임을 갖지 않은 것도 참가자들의 컨디션을 악화시켰다. 저체온증이 유발되기 쉬운 환경이었으므로 다른 프로그램을 생략하더라도 웜업에 집중해야 했다. A그룹 출발 후 B그룹과 C그룹 출발을 10분 간격으로 진행했는데, 융통성을 발휘해서 시간 간격을 줄이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비바람 맞아가며 달려 골인한 다음엔 추위 견디느라 안간힘

옷과 신발이 다 젖은 상태로 출발선을 밟은 참가자들이 1km쯤 달려 서강대교로 접어들자 살벌한 옆바람과 굵은 빗줄기가 이들을 공격했다. 여의도 윤중로로 접어들고 나서는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았지만 비는 여전했고, 샛강공원길을 달릴 때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형성돼 첨벙거리며 건너야 했다.

도착 대회장에선 간식과 함께 체온유지용 은박 비닐을 나눠주었다.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 비닐 하나로 몸을 따뜻하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월드스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울려 퍼지는데도 공연을 보러 몰려가는 참가자보다 뚱한 표정으로 덜덜 떠는 참가자가 더 많아보였다.

주최 측은 대회에 앞서 ‘담요와 텐트, 따뜻한 음료, 난로 등을 준비하겠다’고 공지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뜻한 음료는 많은 참가자들이 이용하지 못했고, 난로는 현장에 준비됐지만 비바람 속에서 가동이 어려웠던 듯하다. 레이스를 마친 참가자들은 몸을 녹이지 못하고 다시 비를 맞으며 지하철역까지 걸어야 했다. (일요일 여의도엔 택시가 거의 없다)

#우중주 참가자들의 ‘개고생’ 전부가 주최 측의 책임일까?

대회 블로그에 참가자들이 게시하는 거친 항의 글의 내용은 결국 주최 측이 우천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현장 운영도 미숙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최 측의 운영은 얼마나 미숙했는지 따져볼 일이다. 사과를 넘어 참가비 환불까지 해야 할 만큼 중대했는지 말이다.

더 유능한 주최사였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홍대주차장에 수백 개의 텐트를 쳐서 대기할 수 있게 하고, 더 두껍고 질 좋은 우의를 더욱 넉넉히 준비해 나눠줬을까? 주로에 형성된 물웅덩이의 빗물을 삽으로 퍼내 쾌적한 주로를 만들었을까? 도착 대회장에는 수백 개의 텐트 안에 난로를 넣고 담요와 따뜻한 차와 먹을거리를 제공했을까? 또한 옷이 다 젖어 대중교통을 타기 어려운 참가자들을 위해 택시비를 지급하거나 셔틀버스를 운영했을까?

우천대책에 대한 일부 참가자들의 항의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적어도 국내에서 최근 10년 동안 열린 수많은 우중주 대회와 비교해서 올해 이그나이트 서울의 대회 운영은 평균점 이상이었다. 생각해보라. 우천 대책은 주최 측만이 아니라 참가자도 세워야 한다. 예컨대 잠깐 쓰고 버릴 수 있는 1회용 우의를 나눠주는 것은, 물품보관 후 경기복 차림으로 방치하지 않으려는 주최 측의 배려다. 흔한 서비스지만 당연한 서비스는 아니다. 또한 레이스 후 갈아입을 마른 옷과 신발, 우산 등은 우중주에 참가하는 러너들이 필수적으로 챙겼어야 하는 소지품이다.

물론 블로그에는 우천대책 이외의 항의 글도 있었다. ▲싸이 공연을 오후 7시에 시작하기로 해놓고 왜 앞당겨 시작했나 (일찍 들어온 참가자들을 빗속에 방치할 수 없어서 공연을 앞당겼다고 해명) ▲참가자가 보관한 물품이 도착 대회장 바닥에 왜 떨어져 있었는가 (하차 과정에서 쏟아졌다고 해명) ▲대회장 쓰레기를 왜 치우지 않았나 (비바람 때문에 청소 인력을 잠시 철수했다가 월요일 오전에 청소 완료했다고 해명) 등이 대표적이다. 잘못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충분히 지적할 만한 실수들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주로에 물웅덩이가 있어 흙탕물에 발이 빠졌다 ▲우의가 너무 잘 찢어진다 ▲간식으로 나눠준 빵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다 등의 과하다 싶은 항의도 눈에 띈다. 주최 측이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데서 벗어나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방위적으로 문제 삼는 모습이다.

#대회 자체가 문제? 애초에 출발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대회 블로그에는 왜 악천우 속에서 대회를 강행했느냐는 성토의 글이 적지 않다. 대회를 할 수 없는 수준인데도 환불을 하기 싫어서 무리하게 진행한 것 아니냐는 요지의 글도 있다. 마라톤대회는 갑작스런 천재지변에 의해 취소될 경우 환불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폭우로 인해 강물이 범람해서 코스 일부가 침수됐다면 한강공원사업소 등의 진행 중단 권고에 의해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경우 환불할 의무가 없으므로 환불을 피하려고 대회를 강행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안전이 걱정돼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참가비를 돌려달라는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었다고는 해도 수천 명이 큰 문제 없이 완주한 대회인데 이 같은 주장이 나온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글들을 보면 2016 이그나이트 서울의 참가자들이 여느 마라톤대회 참가자들과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로드레이스에 대한 이해가 아무래도 부족한 듯 보인다.

로드레이스는 안전상의 큰 문제가 없는 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최 측은 최대한 원활한 레이스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주자들도 각오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중도 포기할 경우를 대비해 비상금을 소지하거나, 레이스 후 컨디션을 위해 옷가지와 간식 등을 챙기는 건 당연한 준비다. 로드레이스의 모든 변수에 대해 주최 측이 책임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최 측이 이미 50% 환불을 약속한 상황에서 100% 혹은 그 이상의 배상을 요구하는 참가자들은 똑같은 잣대를 다른 곳에도 들이댈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에 갔는데 줄서서 너무 오래 기다렸고, 직원들의 서비스가 부실하고, 여름인데 에어컨 가동이 시원치 않고, 음식 맛도 기대보다 별로였다면 음식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가? 불쾌함이나 억울함이 환불을 요구할 이유일 수 있는가 말이다.

이그나이트 서울의 주최사인 푸마는 아마도 멘붕 상태일 것이다. 참가비 4반원을 받아 핫플레이스인 홍대에 대회장을 만들고, 도심 한복판을 통제하고, 싸이 공연을 유치한 결과 수천 명의 안티팬을 양성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나쁜 결과가 있을까? 과연 이번 사태 후에도 주최 측이 대회 개최 의욕을 가질지 의문이다. 서강대교를 막고 달리는 10km 대회를 보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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