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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가이드 - 뉴스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비운의 천재’ 이종희
편집자   등록일 : 2014-06-26 오전 12:26:42

 

    비운의 천재 마라토너로 불리우는 이종희는 1966년 충남 공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했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이름난 마라토너라면 이 정도 시기에 육상으로 전향하는 것이 수순이겠지만 그는 춘천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축구로 성공하기 위해서 학교를 옮겨 다니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인천전문대 체육과에 축구 특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여전히 축구에 열을 올렸지만, 당시 인천전문대 육상팀 감독을 맡고 있던 윤철중 선생에 의해 마라토너로 거듭나게 된다.

 

너무 빨랐던 대학 축구선수, 뒤늦게 마라톤으로 전향


주력이 좋은 축구선수였던 이종희는 우연히 교내 체육대회 10km 단축마라톤에 참가하여 덜컥 우승을 하게 되었다. 이를 본 윤철중 선생은 육상선수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육상팀에 스카웃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축구팀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종희를 불러 육상을 시작해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종희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는데다 축구 실력도 뛰어났고, 결정적으로 육상에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윤철중 선생은 집요한 설득 끝에 일주일에 한두 번만 육상팀 훈련에 참가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그 한두 번 참가하는 훈련에서도 기존 육상부 선수들을 곧잘 압도하곤 하는 것이었다. 윤철중 선생은 극를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고 점차 일주일에 두세 번 훈련에 참가하도록 유도했다. 그 와중에 축구부는 85년 전국체전 지역 예선에서 떨어져 본 대회 출전이 좌절되었고, 별 생각 없이 출전한 육상부 예선에서는 선전하여 10km 로드레이스와 5000m 종목 시 대표로 뽑히게 되었다. 비록 그해 전국체전에서는 입상을 하지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자연스레 중장거리 육상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량을 발휘하여 5000m, 10000m 종목의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제40회 전국남녀육상경기선수권대회> 5000m 종목에서 14분 07초로 우승하고, 10000m 종목에서 29분대 기록으로 준우승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중 5000m 종목 기록은 지금까지도 역대 대학부 6위에 올라있다. 이후 이종희는 당시 5000m, 10000m 종목의 지존으로 군림하던 김종윤(현 계명대 육상팀 코치)과 우승을 다투는 라이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최초로 2시간 12분대에 입성하다


이종희는 대학 2학년이던 1986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 마라톤에 데뷔했다. 여기서는 2시간 29분이라는 평범한 기록을 냈고, 졸업한 뒤에는 1987년 3월 제일제당 육상팀에 입단했다. 당시 제일제당은 허의구, 이용식 등 걸출한 선수를 보유한 명문 팀이었지만, 윤철중 선생은 전문대인 탓에 충분한 트레이닝을 거치지 못하고 실업팀에 들어간 것을 퍽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종희는 그해 동아마라톤에서 실로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게 된다.


이종희, 허의구, 김원탁 등이 참가한 동아마라톤 레이스는 초반에 보통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5~6명이 선두그룹을 형성하여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40km 지점을 지나면서 유재성, 허의구, 김원탁 3파전으로 압축되어 경합을 벌였다. 세 선수를 포함한 선두권이 모두 한국기록을 능가하는 페이스로 달리는 양상이었다.


이종희는 결승점을 얼마 안 남기고 스퍼트 했고, 나머지 두 선수는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종희의 기록은 2시간 12분 21초. 종전 유재성이 1986년 세운 2시간 14분 06초를 크게 능가하는 성적이었다. 이 대회에서 2위 허의구(2:12:23)와 3위 김원탁(2:12:26)을 포함하여 3선수가 12분대에 입성하고, 총 5명의 선수가 종전 한국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육상계는 물론 전국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신문과 방송은 한국 마라톤이 침체를 딛고 12분대에 입성했으며, 이런 기세라면 10분대 진입도 머지않았다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종희는 이 대회로 말미암아 국민적인 스포츠 영웅으로 부상했음은 물론, 1000만 원의 포상감도 손에 쥘 수 있었다.(사실 86년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 등 육상 스타들이 포상금을 너무 많이 받았다 하여 당초 7000만 원이던 포상금이 대폭 깎였다.)

 

너무 일찍 주로에서 사라진 비운의 천재


마라톤 입문 2년도 채 안 되어 정상에 등극한 이종희였지만, 한국기록 작성 이후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위권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다가 상무 팀에 입단했고, 안방에서 열린 1988년 올림픽에는 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친정팀 제일제당과 마찰을 빚으며 방황하기도 했다.


결국 1992년경 현역에서 은퇴하고 경명대학교 육상팀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제2의 육상인생을 펼쳐보기도 전에 199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은퇴한 뒤였다고는 하지만, 젊은 육상 천재를 잃은 이 사건은 육상계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육상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처럼 또 급작스럽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마라토너 이종희는 그야말로 천재성이 돋보이는 선수였다. 그의 스승 윤철중 선생은 “평생 만나보기 힘든 걸출한 선수”이며 “더 빨리 육상에 입문할 수만 있었다면 한국 마라톤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술회할 정도다.

 

이종희의 12분대 입성은 한국 마라톤이 진일보하는 동시에 이후 세계기록에 다가가는 큰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당시 세계 기록은 이미 10분벽을 넘고 있었지만, 국제대회에서도 10분대 전후의 기록이면 우승권을 넘볼 수 있었으므로 일약 한국 마라톤을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종희는 역대 한국 마라토너 중 가장 신체조건이 좋은 선수였으며, 타고난 재능도 있었다. 이를 알아본 윤철훈 선생(현 인천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정상급의 마라토너로 키워낸 것 또한 훌륭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기간 한국 마라톤의 왕좌에 군림하다가 돌연 세상을 떠난 그를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지만, 한줄 기록만큼은 그가 12분대를 기록한 최초의 한국 마라토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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