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풀코스 완주

2016년3월20일은 제87회 동아마라톤 출전일이였다. 내 인생 첫 풀코스, 엄청난 도전! ‘첫’과 ‘엄청난’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부담감 때문일까? 피니쉬 라인을 통과할 나를 상상하며 미친 듯 설렜다가, 1km도 못가 나 혼자만 포기하는 공포스런 상상에 우울해졌다가……. 훈련만으로도 힘든데, 참으로 종횡무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내 불안을 더욱 자극한 건 완주티셔츠와 무릎이었다. 이번 대회는 출전기념티셔츠 외에 5시간 이내 완주할 경우 완주티셔츠를 준다. 물욕(物慾)의 노예인 나에겐 엄청난 동기부여인 동시에 ‘못 받으면 어쩌나’하는 조바심을 발생시켰다. 나만 못 받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다. 문제는 무릎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건초염 진단을 받았다. 무릎의 근육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막이 찢어진 것인데 달릴수록 더 아파지고, 한번 찢어지면 완쾌라는 게 없단다. 달린 후 얼마나 아프던 그것은 기꺼이 감당하겠다. 달리는 동안만 버텨다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날의 비장함이 살짝 낯 뜨겁지만, 그 당시엔 정말 진지했다.

이른 아침에 함께 출전하기로 한 일행을 시청 앞에서 만났다. 출발 전 파워 충전을 위해서다. 라면! 마라톤은 라면심이다. 으핫! 특별한 날이니 삼각김밥도 추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라면국물로 달랬다. 안정이 되는가 싶었지만 머리카락이 쭈뼛 서도록 다시 세차게 쿵쾅거리는 마이 하트~! 아~5시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도착한 광화문 앞! 87회차 대회의 스케일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까만색 대한통운 짐차가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광화문 삼거리까지 늘어서 있는 풍경이라니. 배정된 짐차가 71번이었지만, 정말로 70대가 넘는 차가 주차되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더랬다. 7시20분. 짐 보관 마감시간이 지나자 트럭들은 칼같이 출발했다. 그리고 어느덧 나의 출발시간도 다가왔다. 앞서 출발한 수많은 사람들의 뒤통수 물결을 바라보며 나도 스타트 라인을 지났다. 삑- 삐---익----! 여기저기서 울리는 이 소리들 중에 내 기록칩이 낸 것도 있겠지. 피니쉬 라인에서도 꼭 듣고 말테닷!

휴대폰과 보조배터리, 에너지젤, 혹시 모를 비극적 상황에 대비한 현금과 교통카드. 허리에 찬 벨트가 묵직하다. 오랜 시간 달려야 하기에 준비한 것들이다. 2분도 달리기 어렵던 내가 5시간을 달릴 상황에 대비하다니. 준비는 완벽했고(몸상태와는 별개로), 이제 내가 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달리는 것뿐이었다.

광화문을 출발해 종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등을 왔다갔다 휘저은 후 17.5km 지점에 돌입했다. 여기부터는 반환점 없이 오로지 직진만이다. 두 번의 하프, 한 번의 32.195km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아직은 무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무릎도 얌전했다. 하프 무렵 부터였을까. 지나는 모든 길에 파스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길옆으로 비켜나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는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 것이다. 조금 지나면 사라지겠지 했는데, 완주 후 경기장을 떠날 때까지 줄곧 그랬다.

1)출발 20분 전과 7km 구간마다 에너지젤 먹기.

2)10km 이후 급수대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기.

3)바나나든 초코파이든 주어진 간식은 꼭 챙겨먹기.

3번 빼고는 잘 수행했다. 갈증의 고통이 생각보다 컸다. 조금 전에 급수대를 지났는데 금방 입술이 말라왔다. 물을 한껏 머금은 스펀지로 입술을 축였지만, 쩍쩍 마르는 입안에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밀어 넣게는 안 되었다. 잡으면 다 내 것인데, 스쳐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바나나들이여~~! 에너지젤을 급하게 밀어 넣다가 코로 역류하는 해프닝도 겪어보고……. 이렇게 마라톤 무용담이 만들어져 간다.

32km 이후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내 몸 상태도 신세계, 주변에 보이는 정황들도 신세계. 하프를 지나면서 조금씩 아파왔던 무릎이 어느 순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더 이상 찢어질 막이 없어서 그런가? 이대로 쭉 안 아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여태 달려온 속도에서 조금만 늦춰도 무릎이 악 소리 나게 아파왔다. 이전에 느꼈던 통증과는 격이 다르다. 멈추는 순간 절대 다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완주티셔츠는 bye-bye-. 저만치 물 건너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급수대가 큰 장애물이었다. 물이 꼭 필요한데, 사람들이 몰려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춰야했다. 악~!! 기존 속도를 빨리 회복하기 위해 종이컵을 잡자마자 냉큼 빠져나왔더니 종이컵의 물이 절반으로 줄었다. 아스팔트만 신났다. 에잇~ 마시자마자 바로 목이 마른 상태에서 다음 급수대까지 버텨야 했다. 비오는 날 달리기가 매우매우매우 그리웠다.

슬슬 피를 보이는 주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싱글렛을 입은 남자 주자들에게서 많이 보였는데. 계속된 옷과의 마찰로 겨드랑이 주변부에 피가 나 옷까지 물들인 것이었다. 어맛! 마라톤 풀코스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말로만 듣던 출혈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자 달리는 우리 모두가 사이코 같았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피까지 내면서 달리는가.

하지만 생각할 여유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찾아온 내 몸의 한계. 멈춰버리고 싶은 약한 마음의 폭발. 어떻게 다잡아야 하지? 경험해 본 적 없다.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얘기다. 두려움이 커져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그 순간. 바로 뒤에서 기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러 사람이 함께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허이야~ 허이야~ 뒤를 돌아보니 스무 명 정도의 무리가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무리의 리더는 ‘일산마라톤’ 조끼를 걸친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리듬을 타세요. 리듬을 타면 달리기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보폭을 다른 사람과 맞추세요.”

“자! 소리 지릅니다.”(허이야~ 허이야~는 이 멘트 후 선창한 리더를 따라 무리가 낸 소리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무리를 향해 계속해서 멘트를 던지는 초인 등장! 헥헥거리기도 힘든데, 뒷사람에게까지 닿을 만큼 큰 소리를 내다니. 냉큼 무리에 끼어들었다. 함께 달렸다. 소리 지르라고 하면 지르고, 보폭 맞추라고 하면 맞췄다.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렇게 36km지점까지 그 어르신의 신세를 졌다. 고비가 지나갔고 남은 6km는 무리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겁이 났지만 서서히 떨어져 나와 홀로 달렸다.

홀로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후회했다. ‘괜히 나왔어.’ 한 열댓 번은 저 소리를 중얼거린 것 같다. 아~ 정말 힘들고 지루한 6km였다. 주경기장 입성 후 피니쉬 라인까지 멋지게 전력질주 하겠다는 야심은 개나 줘버려! 달릴수록 골인지점 깃발이 자꾸 도망가는 것 같아 짜증만 폭발했다. 하지만 결국 왔다. 동아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알리는 삐----익----소리를 듣는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 순간의 내 상태를 표현하자면, 김연아 선수가 벤쿠버 올림픽에서 프리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마친 후 울먹울먹했던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는 사람을 만났다면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하지만 당시의 나는 혼자. 눈물이 좀 머쓱하게 느껴졌다.

4시간39분48초!

나의 첫 풀코스 완주 기록이다. 완주티셔츠는 나의 품으로~~!! 으하하하하

환희로 충만했던 그 당시에 후기를 썼어야 했는데, 다음 날 바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가야했다. 근육이완제와 소염제를 퍼부으며 버텨냈던 시간들이여~~! 그러는 사이 후기쓰기는 자꾸만 미뤄졌다. 시간은 인생 최고의 순간도 예외 없이 지워버린다. 기억은 남지만 충만했던 환희는 유지되지 않는다. 꿈만 같다. 이 사라져가는 환희를 다시 잡기 위해 사람들은 달리고 또 달리나 보다. 완주 후 첫 느낌은 “내 다시는 풀코스를 달리지 않으리~”였는데, 다시 달리고 싶어졌다. 완주를 알리는 내 기록칩의 삐—익— 소리. 그 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