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4]
구질구질했던 나의 첫 마라톤 中

(上편에 이어)

“파이팅!! 힘내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아자, 아자!!”
이미 온 힘을 다 내고 있었고, 포기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컨디션이 꽤 좋은 편이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응원하는 사람들 보기에는 도무지 힘이 없어 보이고 곧 포기할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뭐 어쩔 것인가. 급수대에서 물을 집어 쭉 들이켰다. 식도를 쓸고 내려가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몸이 슬슬 풀리고 있었다.

“저, 우리 수준이 비슷한 것 같은데 같이 뛰죠”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두 참가자 중 마른 체구에 나이 지긋해 뵈는(60 전후로 추정) 이가 제안을 했다.
“네 그러시죠 우리끼리 경쟁할 것도 아니고 서로 응원하면서 가시죠.”
우락부락한 체구의 다른 한 명(20대로 추정)도 맞장구를 쳤다.
“좋습니다. 서로 잡담이라도 나누면 덜 힘들겠네요.”
나 역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최하위로 처진 마당에 혼자보다야 둘이 좋고 둘보다야 셋이 나은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둘 다 나보다 한 수 아래로 보였기에 이들과 같이 가더라도 막판에 치고 나가기가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리지만 나름 리듬을 타면서 꼴찌 3인방은 두 번째 급수대를 지났다. 봉사자와 시민들의 우려스러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기분만은 상쾌했다. 뒤따르는 엠뷸런스는 중환자 병상을 살피는 간병인처럼 종종 3인방 옆으로 붙어 상태를 물어보곤 했다. 물론 우리는 그럴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거나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전혀 문제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15km 지점 3번째 급수대를 지났다. 초반에는 서로 통성명도 하고 마라톤 경력도 물어보면서 대화 모드로 달렸지만 어느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텝에 맞춰 규칙적으로 따라오는 호흡이 대화를 방해했다. 달리기 리듬은 완전히 무르익는 시점이고, 체력의 게이지는 안정 상태를 벗어나는 시점이었다. 이른바 ‘몸이 풀릴 만하면 지쳐가는’ 초보자만의 비극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뭐 어떤가. 자기 수준에 맞게 열심히 즐기면 그것이 마라톤 아니던가.

약 18km 지점을 지날 때쯤 엠뷸런스가 다시 옆으로 붙었다.
“한 템포 느려지셨네요. 다들 괜찮으시겠어요? 이번만 기회가 아니니까 무리다 싶으시면 타세요. 마라톤은 욕심 부리는 거 아니에요.”
이건 뭐 속도 좀 느리다고 무시하는 건가. 마라톤은 고사하고 조깅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간호사가 마라토너 3인방에게 욕심 내지 말라며 훈계를 하다니. 존심이 많이 상했다.
“허, 웃기는 소리 마요. 후반을 위해서 힘 아끼는 중이라구”
내가 한마디 쏘아붙였고
“이십킬로도 안 됐는데 뭔 소리 합니까? 쫌 뒤로 가가 따라 오이소”
마른 체구 60대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저, 저기… 저는 타겠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완주만은 하겠다면서 호기를 부리던 우락부락 청년이 황급히 엠뷸런스에 매달렸다. 미처 눈치 채지 못했는데 같이 페이스 맞춰 달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지고 입술도 핏기가 없이 탁한 걸 보니 더 이상 달리는 건 확실히 무리인 듯했다. 차마 말릴 수가 없어 몸조리 잘 하라 이르며 차에 타는 걸 도와주었다. 엠뷸런스는 우락부락 청년을 태우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황량한 4차선 도로를 마른 체구 60대와 나 둘이서 터덜터덜 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웬 남자 둘이 차도에서 뛰고 있나 싶었을 것이다. 우리도 대회가 실감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워낙 참가자가 적고 우리 실력은 미천하다 보니 출발 첫 급수대 이후 다른 주자들과 마주치질 못했다. 돈 내고 번호표를 달았다 뿐이지 평소 연습할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고령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성실하게 보조를 맞춰 달려주는 파트너가 있으니 외롭지가 않았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결승점이 나오지 않겠는가…….

“자~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합니다. 열심히 가이소.”
20km 지점에서 마른 체구 60대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내가 같이 멈추가 그는 웃으며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 아니, 왜 그러세요? 그냥 조금 천천히 가시죠. 포기하지 마시고.”
“야유,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르신, 그럼 같이 쉬다가 가시죠.”
“아이구, 나는 애초 완주할 생각 없었어요. 그저 한 삼십킬로, 운 좋으면 삼십오킬로 정도 뛰어볼까 했는데 어림도 없네 고마. 날이 추워서 그런가 교통사고 났던 무릎도 땅기고…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이소. 나는 아까 그 엠뷸런스 기다렸다가 타고 갈랍니다.”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마지막 한 명이 포기함으로써 꼴찌가 확정되니 의욕이 땅에 떨어졌다. 시간도 문제였다. 20km 지점까지 2시간 10분을 찍었으므로 제한시간 안에 골인하기가 빠듯할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지체된 건 엄연히 내 체력 탓이지 그와 동반주한 탓은 아닌데도 그에 대한 원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말 뛰기 싫었다. 25km 급수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발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심지어 배꼽까지 꾹꾹 쑤시는 듯이 아팠다.
성질이 났다. 주최 측 운영도 불만스럽고 엠뷸런스도 불만스럽고 자원봉사자도 불만스럽고 지나가다 날 쳐다보는 아저씨도 불만스럽고 도로에 붙은 까만 껌딱지 마저 불만스러웠다.

25km 급수대에 가니 말끔하게 치워진 테이블에 500ml 생수 한 병이 놓여있었다.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자원봉사자가 해맑게 웃으며 물을 권했다.
“이거 아저씨 거예요.”
“그래? 왜 내 거니?”
“한 명 남았다고 연락 와서 한 병 남겨놓은 거거든요.”
“나 때문에 혼자 지키고 있는 거였구나?”
“히히~ 네.”
정말 민망하고 쪽팔리고 미안했다. 필리피데스처럼 승전보를 전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습 부족한 상태로 참가하는 바람에 레이스 중반부터 허우적대고 있으니 이 무슨 민폐란 말인가. 양껏 마시고 세수까지 한 다음 자봉소녀와 작별을 고했다. 한꺼번에 많이 마신 물이 뱃속에서 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