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3]
구질구질했던 나의 첫 마라톤 上

나 호박씨는 클럽 모임에 가서 ‘장딴지에 힘 좀 주는’ 정도의 인지도를 갖고 있다. 그 인지도라 함은 마라톤을 해온 년수, 풀코스 기록, 완주횟수, 마라톤 상식 등 몇 가지 능력치를 두루 합산하여 얻어진다. 인지도가 낮을 때는 모임 사람들 대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일단 중급 이상의 인지도를 갖추고 나면 상당히 여유가 생기고 모임 생활도 재밌어지기 마련이다. 군대 짬밥 먹는 것이나 온라인게임 레벨업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겠다.

여하간 ‘장딴지에 힘 좀 주는’ 정도의 인지도가 생긴 뒤에는 가급적 초보시절 얘기를 삼가게 된다. 다른 마라톤 경력 미천한 회원들에게 ‘센척’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과거사에서 어리숙했던 부분은 싹 걷어내고 근사한 경력만 따로 모아서(이를테면 중도 포기한 이력을 숨기는 식으로) 기록에 연연하지 않지만 맘먹으면 중상위권 기록을 낼 수 있는 쏘~쿨한 러너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이 지면에는 구질구질했던 나의 첫 마라톤 이야기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마치 고해성사 하는 마음으로.

서른 되던 해 초봄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나 호박씨는 5킬로, 10킬로를 거쳐 하프를 세 번 뛰고 그해 겨울(11월 하순) 바로 풀코스에 도전했다. 남들도 대충 그 정도 타이밍에 풀 도전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그렇게 한 것이다. 딱히 자신이 있었거나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얼떨결에 대회 이름이 제법 근사해 보이는 대회의 ‘참가신청’ 메뉴를 클릭한 뒤 기계적으로 빈 칸을 메웠을 뿐이다. 너무나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기념품과 번호표가 택배로 배달된 뒤였다.

인생 뭐 있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대회에 나갔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간 것 아니겠냐고? 제법 속도도 붇고 20km 쯤은 손쉽게 완주할 수 있게 돼서 풀코스에 도전한 것 아니냐고?
아니다. 당시 내 하프기록은 2시간 20분 전후. 그나마 ‘즐기면서’ 뛰는 게 아니고 정말 사력을 다해(후반에는 걷기도 하면서) 뛴 게 그 모양이었다. 이유식 먹고도 체하는 아기가 어른들 먹는 고봉밥에 덤비는 격이니 참으로 무모하기 그지없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출발 시간이 임박했다. 풀코스 참가자들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니 그제야 내가 뭔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단순 계산으로도 5시간은 족히 잡아야 완주가 가능한데, 과연 그 오랜 시간동안 버틸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진짜 죽거나 까무러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사회사의 밝고 경쾌한 멘트가 스피커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자, 여러부~운!! 이제 풀코스에 도전할 소수정예 마라톤 전사들만이 남았는데요, 다들 너무 늠름해 보이십니다. 이제 출발 시간이 약 삼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나 같은 놈도 섞여 있으니 ‘정예’는 아니었지만 소수인 건 확실했다. 한 이백 명도 안 돼 보였다. 물론 다 관록 있어 보이는 근육질 러너들 뿐이었다. 도톰한 뱃살을 가진 놈은 나 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 주책없이 끼어든 형국이랄까?

“다들 아시겠지만 상당히 쌀쌀합니다. 워밍업 충분히 하시고요, 제한시간이 5시간이나 되니까 절대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즐기면서 뛰십시오. 절대 기록에 연연하시면 안 됩니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못 낄 데에 끼여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워밍업을 충분히 하라지만 나는 워밍업 할 힘마저 아껴둬야 할 만큼 저질체력이었고, 5시간 제한시간이 넉넉하다지만 내게는 빠듯할 뿐이었고, 천천히 즐기며 뛰라지만 내가 그랬다간 대회 주최 측에 큰 민폐를 끼칠 것이 분명했다. 기록에 연연하지 말라는 대목에선 헛웃음마저 나왔다. 완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할 지경이었으니.

“자, 천천히 몸을 풀면서 출발하겠습니다. 열, 아홉, 여덟……셋, 둘, 하나, 추울~바알!”
사회자의 간절한 조언대로 천천히 몸을 풀면서 달렸다. ‘천천히’의 기준은 개인차가 매우 컸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주자들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주자들도 빠른 속도로 나를 앞질러갔다. 한 1km쯤 달렸을까? 자동차 엔진소음이 가깝게 들렸다. 후미를 따라붙은 엠뷸런스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역시 내가 꼴찌구나’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웬걸? 몇 걸음 뒤에 다른 주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길동무가 있는데다가 잘 하면 꼴찌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잡생각은 버리고 달리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순위가 무슨 상관이며 기록 또한 무슨 상관이랴. 길이 있고 나는 달릴 뿐이라……. 가볍게 땀을 내면서 5km 지점 첫 번째 급수대를 맞이했다. 자원봉사자와 지역 주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나는 나름 순탄하게 리듬을 잡아가며 좋은 컨디션으로 달리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