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2]
한방에 훅 가신 박감독님

나이 먹으면서 느는 건 ‘척’밖에 없다는 소릴 누군가 했는데, 그 말 늘 공감이 간다. 있는 척, 안한 척, 모른 척, 아는 척, 좋은 척… 참 많은 ‘척’들이 있다. 그중 들켰을 때 가장 쪽팔린 건 뭘까. 내 생각엔 ‘아는 척’이다.

정말 아는 척을 많이 하는 달림꾼 한 명을 알고 있다. 마라톤과 관련 된 것이면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인 사람이다. 훈련법, 음식섭취, 마라톤 역사, 스포츠의학 이론, 주요 마라톤 선수들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줄줄 꿰고 있으니 듣는 입장에선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동호회 안에서 ‘박감독’이란 숭고한 애칭으로 불린다. 그냥 불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감독 대접을 받는다. 벤치코트 차림으로 훈련장에 나타나면 여자 회원이 타다 주는 커피 한 잔을 먹고서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거창하게 ‘썰’을 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선수들 기록수준이 영 엉망이에요. 그게 다 후진적인 훈련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거거든. 선수들 정신머리 해이해진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일본만 해도 선수별로 훈련스케줄이 다 따로 나오고 전담 트레이너며 심리상담사까지 다 갖춰져 있어요. 스케줄표 보면 뭐 기가 막히지. 어마어마하게 디테일하거든 훈련 조합이 말이야. 그런 기본적인 데서부터 차이가 나니 우리가 걔네보다 수준이 높을 수가 없는 거야.”
어느 새 주위로 모여든 회원들은 청산유수 같은 그의 말에 토 한 마디 달지 않고 경청을 한다. 순한 양처럼 다소곳한 표정을 하고서.

“근데 우리가 배워야 할 거는 일본식이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케냐식이지. 스타 선수들이 만들어 놓은 훈련캠프에 가서 걔네들 식 훈련을 배우면서 걔들하고 경쟁을 해야 돼요. 일본식은 한계가 있어. 왜냐? 어차피 일본 애들도 세계의 벽을 못 넘거든. 한계가 애초에 드러난 거거든. 그런데 우리가 일본의 아류가 돼 가지고 세계수준이 될 수 있겠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가 한바탕 일장 연설을 뿜어내고 나면 경청하던 회원들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를 칭송하기 시작한다.

“아유, 우리 박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면 한국 마라톤이 좀 달라질 텐데 말이야. 거 왜 우리나라 체육계는 이런 인재를 스카웃 안 해가나 몰라?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고 차별하는 건가? 허허허.”
“어허 참 그런 말 농담이라도 마셔. 나 그런 데 불러줘도 안 갑니다. 다 곪아 터진 데를 들어가서 내가 뭘 해요. 그냥 나~중에 진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그 자라나는 꿈나무들한테는 내가 기회 되면 말이야 좀 지도해볼 생각도 있긴 있지.”
이런 식으로 나대는 사람이나 띄워주는 사람이나 점입가경으로 치닫곤 하는데, 클럽 회원들끼리는 이미 익숙해져서 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나처럼 가끔 듣는 입장에선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싶지만.

그의 아는 척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빨을 가로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타고난 입담에다 사람 홀리는 제스처를 가지고 있었고, 마라톤에 관한 한 도무지 마르지 않는 얘깃거리를 섭렵하고 있었다. 3시간 초반대의 준수한 기록에다 멋진 러닝 폼을 가졌고, 즉석에서 주간훈련프로그램을 짜줄 정도로 훈련 이론에도 강하니 누가 감히 딴지를 걸고 나올 것인가. 그저 좀 꼴사나운 데가 있긴 해도 워낙 아는 것이 많은 양반이라고 인정해주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던가. 그가 직격탄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낙엽 흩날리는 청명한 가을날, 어느 대회장에서였다. 그 날도 그는 벤치코트 차림으로 여자 회원이 타다 바친 커피를 홀짝거리며 추종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것도 지가 무슨 내빈이라도 되는 양 대회운영본부 텐트에 자리를 차지하고서 말이다.
“오늘 기록대들 다 괜찮네. 습도가 적당해서 기록이 잘 나오는 거라고. 저 양반은 상체만 딱 잡아주면 오분은 그냥 당기겠어. 누가 가르쳐 줘야 느는데 가르쳐줄 사람이 흔치 않지.”
그는 결승점을 통과하는 주자마다 시시콜콜 평가하면서 왕초 놀이에 한껏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언변은 언제나처럼 그럴 듯했고, 주위에서도 잘 받아주었다. 그러나 하프코스 우승자가 들어올 때 던진 한 마디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허어~ 대단하네. 환갑은 돼 보이는 양반이 싹 제끼고 일착을 해버렸네. 이야~ 저게 하체에 힘이 딱 들어있어서 가능한 거거든. 스테미너로 뛰는 게 아니라 하체 힘으루다 쭈~욱 밀고 가는 거지. 가볍게 탕탕 치고 가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한데 뭐 몸에 밴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저런 양반이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면 일이 분은 그냥 땡길텐데 말이야. 연세가 있어서 불가능할 것 같지만 말이야, 왜 땡길 수가 있냐면은 전문적으로 운동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 소모가 안 됐거든. 그래서 발전이 될 수 있는 거지. 딱 보면 엘리트 출신이랑 일반인이랑 차이가 나요. 보통 사람들 보기엔 똑같어두 우리 같은 사람이 보면 대번에 알아보거든. 선수 출신은 말이지…”

경청하던 주위 사람들 가운데더 누군가가 불쑥 나서서 말을 끊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라 사람들의 이목은 그에게로 집중됐다.
“아이구 박감독 그것이 뭔 말이여. 저 양반 선수생활 오래 헌 양반인디. 문흥주 선생이라고 모르는가?”
“아… 아, 그래요? 나는 잘 모르는 이름이네. 뭐 내가 국내 엘리트 선수 쪽엔 관심이 많지 않아서 유명했던 선수 아니면 잘 몰라요 허허허.”
“허허 참 별 소릴 다 들어 불겄네. 한국기록을 10년간이나 보유했던 양반인디, 그런 양반이 안 유명하면 누가 유명한 사람이당가?”
“…….”
도무지 수습될 수가 없는 명명백백한 실수, 그동안의 ‘말빨’을 송두리째 의심케 하는 그의 멘트에 주변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 그러게 잘난 척 좀 작작 하지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판 표정, 이른바 ‘썩소’라 불리는 그 표정으로 굳어졌고, 주위에 달싹 붙어있던 동호인들도 달리 할 말을 잃고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대회장에서 보지 못했다. 설마 그 날의 충격 때문에 마라톤을 그만 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면목이 없어서 선글라스나 모자 뒤에 숨어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것이겠지. 한 번의 실수로 ‘훅’ 가는 게 연예인들만의 얘기가 아니란 걸 그가 증명해 주었다.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