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
마라톤 스승, 마라톤 폐인이 되다

우리 주위엔 마라톤에 미친 사람 참 많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다 조금씩 미쳐서 하는 게 마라톤인 것 같다. 일주일에 하루 주어지는 휴일에 자청해서 개고생을 하겠다고 대회장으로 기어 나오는 사람이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라톤에 미쳤다’는 말이 일면 칭찬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중증으로 접어드는 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치는 데도 급수가 있다. 달리는 쪽으로만 곱게 미쳐야 하는데 그게 심하게 엇나가는 양반들이 있다. 내 사회친구 한 명이 그렇다. (실명을 밝힐 수 없으니 편의상  ‘A씨’로 표기) A씨는 나에게 마라톤을 전수해준 고마운 사람이며, 용품을 구입하는 요령이나 고수들의 훈련 노하우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준 마라톤 스승이다. 물론 대회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는 재미까지도 일러주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A씨는 도를 넘기 시작했다. 신청하지 않은 대회에 뻐꾸기(참가비를 내지 않고 배번호 없이 레이스를 하는 것)로 나가 뛰는 일이 많아지더니 머지않아 모든 대회를 뻐꾸기로 뛰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전혀 친분이 없는 동호회 부스에 태연스레 쳐들어가 그네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거하게 얻어먹는가 하면, 대회가 끝날 무렵 운영본부로 찾아가 남은 기념품 등을 한아름 받아오기도 했다. 대회장에서 그는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A씨가 점점 창피하게 느껴졌다. 좋든 싫든 대회장에서 수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인데 자꾸 남부끄러운 행동을 하니 같이 돌아다니기가 거북했다. 남들이 나까지 싸잡아 욕할까봐 두려웠다. 그렇다고 오랜 친구를 피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하루는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이봐 A씨. 대회장에서 조금 점잖게 굴면 좋겠어. 살 만큼 사는 사람이 자꾸 그러니까 좀 그렇잖아. 재미로 그러는 건 알지만 조금만 참자 응?”
그가 무안할까봐 최대한 부드럽게, 가급적 완곡하게 말했는데 그는 아주 별 시답잖은 얘길 다 듣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껄껄걸 아이구 호박씨. 괜찮어, 괜찮어. 이런 게 다 한국사람 정이고 풍류지 이 사람아. 내가 뻐꾸기 뛰는 거 땜에 그러는 모양인데, 마라톤 코스가 뭐 전세 내고 뛰는 건가? 서울시민이 다 공유하는 거지. 기왕 대회 하는 거 시간 맞춰 와서 같이 뛰는 데 무슨 문제가 있어. 아무 문제 없는 거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동호회들 찾아가서 그러는 거 있잖아. 그건 좀….”
“에이~ 괜찮아, 괜찮아. 자기들이 싫다고 안 하잖아. 같이 마라톤 뛴 사이에 좀 섞여서 놀면 어때? 그게 다 사람 사는 멋이고 재미지. 너무 민감하게 굴 거 없어. 마라톤 대회장에선 다 그러고 노는 거야.”

A씨는 자기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오히려 나를 꽁생원 취급하면서 놀렸고, 자신과 ‘비슷한 과’인 철면피 러너들 몇몇을 포섭해서 아주 조직적으로 진상 짓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는 황야의 무법자가 되었다. 주말이면 대회가 열리는 곳에 찾아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했다. 그나마 마라톤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돈 안 내고 뻐꾸기 짓 하는 게 질렸는지 대회장을 어슬렁거리며 동호회 부스나 협찬사 부스(뭔가를 공짜로 나눠주는)를 드나드는 데만 열중을 했다.
가끔은 대회 운영본부에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대회 스탭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구했는지 팀장급 스탭들에게만 지급되는 비표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일 하는 흉내만 조금 내다가 대회가 마무리될 무렵 남는 대회 물품을 알차게 챙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그가 ‘챙기는’ 것들은 정말 별 것이 아니었다. 초코파이나 바나나 같은 간식, 자원봉사자들 먹으라고 주문해 놓은 도시락 몇 개, 주로에 뿌리고 남은 생수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운 좋으면 사이즈 교환용으로 대회장에 가져 온 기념품 티셔츠를 챙길 수도 있긴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아다시피, 마라톤 대회 기념품이란 게 뭐 그리 탐낼 물건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대회 참가를 기념하는 것이지 어디 입고 나가서 뽐낼 만큼 고급스러운 물건은 아니지 않던가.

나는 요즘도 가끔 대회장에서 A씨를 만난다. 가급적 알은 체를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한다. 그도 나를 굳이 알은 체 하지 않는다. 대회장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니느라 워낙 바쁘니까. 나에게 마라톤을 전수해준 ‘마라톤 스승’이 ‘마라톤 폐인’으로 변신해서 '추노'처럼 대회장을 뛰어다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애처롭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실로 복잡한 감정이 가슴팍을 훑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