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 [29]
봄날, 낮술 먹다 벌어진 뻐꾸기 논쟁

실로 오랜만에 대회에 참가해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초보 시절에나 경험했던 묵직한 허리·무릎 통증에 묘한 쾌감마저 느끼며 대회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호박씨 아니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클럽 회원 A씨와 B씨였다. 올해 들어 대회는커녕 클럽 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못하다 보니 수 개월 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왁자지껄 인사를 나눈 다음 우리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짐을 챙겨 가까운 음식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만큼 식사를 빙자한 낮술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훌륭하고 거룩한(?) 자리에서 뜻밖의 논쟁이 벌어졌다.
“크으~~ 역시 열심히 뛰어서 완주한 직후에 먹는 술이 최고란 말이야. 흐흐.”
한 잔 가득 따라서 입에 털어 넣고 A씨가 말했고,
“난 완주지만 A씨는 완주가 아니지, 짝퉁 완주지 짝퉁 완주.”
B가 뾰족하게 받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에이~ 거 섭하게 짝퉁 완주가 뭐예요. 기록증만 없을 뿐이지 출발부터 골인까지 성실하게 코스 다 밟았는데.”
“섭해? 그럼 백보 양보해서 유사 완주라고 해드릴게 흐흐흐.”
“아유 이 양반 너무 융통성 없구먼 그려. 돈 없는 서민이 뻐꾸기(참가신청을 하지 않고 배번 없이 레이스 하는 것) 가끔 뛰는 거 갖고 뭘 그렇게 타박이셔 타박이. 이래서 우리나라 복지가 아직 멀었다는 거야.”
“서민 다 죽었네. 나보다 훨씬 잘 벌면서 웬 엄살이야. 뻐꾸기 그거는 습관이야 습관. 담배 끊듯이 딱 끊어야 된다구.”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아직 담배를 못 끊고 있잖어. 뻐꾸기도 너무 재밌어서 끊기가 어려워. 돈 내고 뛰는 대회보다 기록도 더 잘 나온다니까. 하하하….”

만담처럼 오고가는 말 속에 ‘잔뼈’가 가득했다. 이거 낮술 한 잔 하려다가 괜한 논쟁에 엮였구나 싶었다. 하지만 화제를 억지로 돌리거나 자리를 일찍 파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 논쟁이 누구의 승리로 돌아갈 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A씨는 평소 서글서글해 보이면서도 의외로 원칙주의자였다. 클럽 내에서도 회계가 부정확하거나 연간 일정이 변경되면 상당히 까칠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특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마라톤대회를 싫어해서 늘 일본 대회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눈엔 일부 회원들의 뻐꾸기 참가가 평소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다.
B씨는 상당히 성실한 편이지만 금전관계가 허술한 편이었다. 빌린 것, 빌려준 것을 쉽게 잊고 흐지부지 퉁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성격 탓인지 뻐꾸기 참가도 전혀 거리낌 없이 ‘즐기는’ 편이었다. 칩도 없으면서 대충 둘러대서 완주메달과 간식을 타고, 종종 운영본부에 가서 남는 기념품을 얻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둘은 물과 기름 같은 성격과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나를 포함헤서 셋이 빈번하게 술자리를 가져왔는데, 그동안 어떻게 큰 마찰 없이 지내왔던 건지 신기하게 여겨졌다. 좌우지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둘은 점차 목소리 톤을 높여가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해선 이런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난 뻐꾸기 뛰는 사람들 보면 정말 매너 없다고 생각해요. 대회도 엄연히 돈 받고 파는 상품인데 그걸 공짜로 주워먹는다는 건 일종의 절도예요 절도. 3만 원짜리 대회를 꽁으로 뛰면 참치횟집에서 왕창 먹고 튀는 거랑 똑같다고요. 안 그래요?”
B씨가 웃음기를 지우고 강한 표현을 쓰자 A씨도 더 이상 웃는 상을 하지 못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이 참 오랜만에 호박씨도 왔는데 왜 그래요. 내가 뻐꾸기 뛰어서 비 매너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주워 먹는다느니, 절도라느니, 또 뭘 먹고 튄다느니 그런 표현을 쓸 필요는 없잖아. 내가 뭐 엄청 큰 범죄라도 저질렀습니까? 참 내….”

“과격한 표현 쓴 건 미안한데, 내가 볼 때는 A씨가 뻐꾸기 뛰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어릴 적에 참외서리 하던 것 비슷하게, 뭐랄까 그냥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예요?”
“말을 그렇게 하니까 말인데, 솔직히 좀 애교로 넘어갈 수도 있죠. 주말에 달리기 운동을 혼자 하려니까 좀 심심해서 대회 하는 곳에 가서 그 양반들 출발할 때 같이 출발하고, 코스도 같은 코스로 달린 거잖아요. 조금 방해는 될지 모르지만 대회를 공짜로 이용한 건 아니죠. 기념품, 칩, 배번호 다 안 받고 뛰기만 한 건데.”
“어허 참. 그러니까 기념품, 칩, 배번호 빼고는 다 공짜로 이용을 한 거죠. 대회 기획하고 코스 만들고, 또 당일날 인력 풀어서 코스 운영하고… 그런 서비스를 다 이용한 거 아닙니까?”
“난 그 서비스를 안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서비스를 받는데 옆에서 달리고 있었던 거지. 흐흐흐.”
“아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그날 현장에 있었던 것 자체가 대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은 거죠. A씨가 안 받았다고 우기면 안 받은 게 아니죠.”
“B씨의 논리가 허점이 많아요. 자, 생각을 해 봅시다. 그 날 한강에 나와서 뛴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대회가 열리는 줄도 모르고 나왔다가 우연히 출발하는 주자들과 섞여서 뛴 거예요. 그리고 우연히 그 양반이 뛴 코스가 대회 코스랑 똑같았던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대회 서비스를 이용한 겁니까?”

A씨의 회심의 반격이었다. 처음엔 승부가 뻔한 논쟁이라고 생각했는데, A씨의 반론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건… 그날 대회 주최 측이 코스 사용 허가를 받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용 허가를 받았지만 도로가 완전히 통제되는 건 아니죠. 자전거나 행인은 옆으로 빠져서 지나가라고 하지만 뛰는 사람들은 원래 제지하지 않잖아요. 그 이유가, 레이스를 방해하지 않는 한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할 권리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
“그러니까 운동하러 나왔던 사람은 대회 서비스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그냥 지나간 거죠. 그렇죠? 그리고 저랑 그 사람의 차이는 대회가 열리는지 알았냐 몰랐냐 그 차이죠? 그죠?”
“잠, 잠깐! 그러니까 중요한 거는, A씨 경우에는 대회 열리는 걸 알고 대회 참가자들처럼 뛰었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제 말은 그냥 대회가 열리는 주로를 지나간 거랑 뻐꾸기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거예요. 대회에 방해만 안 된다면 별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묘하게도 뻐꾸기 참가한 A씨가 논리적으로 승리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황당하면서도 놀라웠다. 어처구니없이 궁지에 몰린 B씨는 용기를 잃고 시시한 반론을 내며 어물거렸다.
“급수대에서 물도 먹고… 대회장 와서 오뎅도 먹잖아요…….”
어느 틈엔가 승리자가 된 A씨는 위로하듯 클로징 멘트를 날렸다.
“앞으론 급수대 이용도 최소한으로 하고, 대회장에서 주는 음식 안 먹겠습니다. 그럼 됐죠?”
“…….”

클럽마라톤 이용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뻐꾸기 러너 A씨의 편을 드실 것인가, 아니면 원칙주의자 B씨의 편에 설 것인가? A와 B의 석연찮은 토론을 들은 나 호박씨는 여러분의 의견이 심히 궁금하다.


Writer's Profile
필명 호박씨, 40대 중반의 (자칭)중상급자 러너다. 밀레니엄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해 ‘길고 가늘게’마라톤을 해왔다.
10여 년간 마라톤 현장을 누비며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웹매거진 클럽마라톤에 독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