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9]
늙은 고수를 만나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충고의 말이 ‘주로에선 노인과 여자와 아이를 얕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디 주로에서만 해당되는 격언인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남녀노소에게 두루 치이기 마련인 것을… 달리기 경력 10여 년만에 깨달은 것은 굳이 누구를 얕보지 않더라도 망신당할 기회가 언제든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에도 그런 ‘소중한’기회가 불시에 찾아왔더랬다.

위장술에 능한 재야의 고수였다. 목트임 단추와 칼라가 달린 긴팔 셔츠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강변 벤치에서 떡을 먹고 있었다. 싸구려 운동화에 기록측정 칩이 매달려 있는 걸 보고서 마라톤 참가자인 걸 알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냥 떡 먹는 노인네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심심했다. 마침 함께 온 동료도 없고 해서 은근슬쩍 말을 붙이고는 별 내용 없는 대화를 나눴다. 연세를 물어보고는 ‘어이쿠 어르신 참 정정하십니다’를 연발하는 식으로. 풀코스를 뛴다 해서 놀랐는데, 그러고 보니 나름 탄수화물식을 한답시고 떡을 싸온 모양이었다. 절편 한 조각을 소 되새김질 하듯 씹더니 비닐봉지에 싸온 죽 몇 숟가락을 오물거리며 먹었다. 나에게도 떡을 권했지만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워 맛볼 생각이 들이 않았다.

“암튼 어르신 참 멋지십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혼자는 나오지 마세요. 자식들 뒀다가 뭐합니까 델구 나오시면 맘도 든든하고 만약 안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대비가 되잖아요”
불과 십여분 전에 예순 다섯이란 말을 듣고도 나는 거의 70대 노인 대하듯 그를 대했다.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그가 실제 70세쯤 돼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 나도 모르게 그런 말투가 된 것이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초반에 따라서 뛸 테니 한 수 가르쳐 주시라고 ‘립서비스’를 던졌다. 노인은 몸 닿는 대로 뛰라며 손을 저었다.

“아이구 젊은 냥반이 나 같은 노땅이랑 뛰어서 뭣에 쓴당가. 다릿심 좋으문 좋은 대로 뛰소. 내도 따라갈 만 허문 바지런히 따라붙을 것잉게.”
듣고 보니 헛 웃음이 나왔다. 겸손의 말인 줄 알았는데 곱씹어 보니 ‘너 뛰는 속도에 맞춰 보겠다’는 말 아닌가. 차이가 나도 대충 비슷한 수준이려니 생각했다는 건가…  언짢은 기분을 안은 채로 출발 신호가 울렸다.

과연 보통 수준은 넘는 노인이었다. 차림새는 황급히 어딘가 뛰어가다가 실수로 마라톤 참가자 무리에 휩쓸려 가는 것처럼 추레했지만 가만 보니 동네 조깅이나 하던 솜씨는 아니었다. 적당한 보폭으로 사뿐사뿐 디디면서 상체도 잘 쓰는 것이 제법 베테랑 느낌이 났다. 왕년엔 달리기 깨나 좋아했을 것 같았다. 나도 늙어서까지 저렇게 달리기를 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달리다 보니 나 때문에 노인의 페이스가 너무 빨라지는 듯했다. 괜스레 폐를 끼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그에게 눈인사를 하고 페이스를 올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내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달리기를 즐기시라고.
아… 그런데 참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13km 정도 지났을 때 문득 옆을 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노인이 달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와 헤어진 뒤로 적어도 3시간 30분 페이스는 유지하면서 달렸을텐데  어떻게 따라온 건지 의아스러웠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은 체를 하며 옆으로 다가왔다.
“아따 힘이 장사구먼 그려. 나 같은 나이엔 힘아리가 없으니께 그저 꾸준히 다리 저어서 가는 길밖엔 없제.”
“허허. 그냥 꾸준히 젓는 수준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뭉스럽게 초보자 행세를 하는 듯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조근조근 뼈아픈 말 ‘한 방’을 날렸다.
“내가 아까부터 뒤에서 보니께 너무 빠르구먼. 첨에는 쪼끔 섭섭하게 가야 나중에 힘도 남고 거시기 헌디 자네는 까꾸루 뛰는 판이제 까꾸루. 허기사 한창 젊은 나이니께 어떻게 뛰든 상관이야 없지 멀. 허허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가 나이에 비해 놀라운 운동능력을 가진 건 그렇다 쳐도 마라톤에 대한 상식이야 젊은 매니아를 따라올 수야 있겠는가? 엘리트 경험은 없어도 마라톤에 관한 책이란 책은 죄다 독파한 나인데, 주변 러너들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죄다 나를 찾아와 물어보는데 말아다.
풀 한 번 뛰어보겠다고 간만에 나온 한강에서 웬 낯선 노인에게 초반 페이스 조절 같은 기초적인 조언을 듣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선생은 허리가 낮찹구먼. 높아야 하는디. 딱 뱃심이 좋아야 허리가 똑바르지. 그래야 조금 젓어도 수월하게 빨리 간다니께.”
정신없이 들어오는 연타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무슨 오인환 감독 할아버지라도 되시나. 왜 남의 허리에 관심을 그리 두시나. 빨리 노인과 떨어지고 싶은데 그는 앞서 갈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는 그를 앞질러갈 자신이 없었다. 상황 판단이 그렇게 되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랄까?

한동안 별 대화 없이 꾸역꾸역 뛰기만 하다가 하프 지점을 지나면서 그에게 물었다.
“어르신, 그럼 평소 훈련은 어떻게 하십니까?”
“훈련은 무신 훈련이여, 그냥 운동삼아 쪼까 뛰는 것이제. 시방 추리닝 빨아논 것 있으문 주구장창 뛰는 것이고, 없으문 걍 쓰봉 입고 두세 시간 뛰다 오는 것이제.”
“…두세 시간 동안 몇 킬로미터나 뛰시나요?”
“아따 누가 거리꺼정 재면서 뛴당가? 기분 좋으문 한강 따라서 끝까지도 가고 그러는 것이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나이만 많이 들었을 뿐 나보다 훈련량이 훨씬 많으니 빠른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재능만 누군가 개발해 줬다면 유명한 마라토너가 됐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를 다시 보게 됐다. 평생 고생만 하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 처럼도 보이고, 미래의 내 모습처럼도 보여서 마음이 짠해졌다.

어느덧 노인과 나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추월해 달리고 있었다. 페이스 조절을 따로 신경쓰지 않고 달렸는데도 내 평소 기록을 상회하는 페이스로 가는 중이었다. 무의식중에 노인의 페이스를 딸간 것일까. 헤이스 후반부로 접어드는데도 자세나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달리는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32km 정도 지났을까. 노인의 페이스가 조금씩 빨라졌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페이스 업이었다. 나로서는 그걸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구 이거 원 허기져서 힘들구먼 나는 먼저 서둘러 가야 쓰겄어. 얼른 가서 국밥 한술 떠야 졸도 안허고 온전히 집에 가제.”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연인처럼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가 위로랍시고 남긴 말은 ‘너를 위해 떠나는 거야’ 따위의 말처럼 가당찮기 그지없었다. 허기가 져서 빨리 가봐아 한다니…….
노인이 떠난 주로는 왜 그리 썰렁하고 황량하던지. 그리고 혼자 뛴 10킬로는 왜 그리 힘에 부치던지. 지친 몸과 마음을 간신히 추슬러 멀리 보이는 결승점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내 마음은 참담했다. 이참에 마라톤을 확 때려치워 버릴까 하는 마음도 잠깐이지만 가졌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서 대회장을 휘휘 둘러보니 그 노인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하긴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사람 하나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왠지 위안이 됐다.
‘그래. 그런 엄청난 노인을 다시 주로에서 만날 확률은 정말 희박할 거야. 그냥 닥치고 열심히 뛰어야지.’


Writer's Profile
필명 호박씨, 40대 중반의 (자칭)중상급자 러너다. 밀레니엄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해 ‘길고 가늘게’마라톤을 해왔다. 10여 년간 마라톤 현장을 누비며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웹매거진 클럽마라톤에 독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