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8]
끔찍한 상상 : 정치인들이 마라톤 선수가 된다면!?

우리는 흔히 말한다. 마라톤은 정직한 스포츠라고. 맞다. 마라톤처럼 제 실력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승부를 깔끔하게 가름할 수 있는 스포츠가 세상에 또 있겠는가? 그 진실함과 담백함 때문에 우리는 마라톤에 매료되고, 탐닉하며, 무한 애정을 쏟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들의 정직한 운동. 그것이 마라톤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엉뚱한 상상에 빠지곤 한다. 서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진흙탕 싸움을 하는 정치인들이 마라톤 선수가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상상 말이다. 그들이 마라톤처럼 정직해지기보다는 그들로 인해 마라톤 판이 구질구질해질 것 같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1 - 동마에서 중도 기권한 ‘김정치’ 선수

기자 : 아쉽게도 32km 지점에서 기권하셨는데, 이번 대회 실패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김정치 : 나는 오늘 경기를 ‘실패’라는 말 대신 ‘더 큰 도전을 위한 숨고르기’라고 자평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훈련의 일환으로서 계획된 기권을 한 것이며,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아만 주신다면 반드시 금메달을 획득할 것을 약속드리겠다.

기자 : 대회 전 기자회견 자리에서는 완주 의지를 강력하게 밝히셨고, 또한 우승을 장담한 바 있다. 이제 와서 훈련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은가?

김정치 : 그것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우발적으로 나온 나의 개인 발언일 뿐 우리 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팀은 분명히 연습 차원의 출전을 준비한 것이 맞다.

기자 : 기자회견 당시 소속 팀이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완주에 실패할 경우 국가대표 포기를 선언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방금 발언은 이를 번복하겠다는 것인가?

김정치 : 그것은 우리 팀 홍보실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며 내 개인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따라서 ‘번복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국가대표 선발에 있어 그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팀과의 결별도 고려할 수 있다.

기자 : 허헉!!!

#상상2 - 춘마 앞두고 열린 ‘김보수’와 ‘이진보’ 선수 기자회견

기자 : 이번 대회에서 두 분 라이벌전에 대한 기대가 큰데, 기록 및 순위 전망은 어떤가.

김보수 : 라이벌이라는 표현이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상대팀의 불법적 방해공세만 없다면 이른바 ‘라이벌 대결’에서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보며 기록도 만족할 만큼 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 : 방금 답변에서 상대 팀이란 이진보 선수의 소속팀을 지칭하는 것인가?

김보수 : 답변하지 않겠다. 기자분들과 국민 여러분들이 혜안을 가지고 이해판단 하시리라 믿는다.

기자 : 이진보 선수도 답변을 바란다.

이진보 :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있듯이 압도적이고도 정정당당한 승리를 예상하고 있다. 상대팀의 비상식적 방해공작만 없다면 필승할 것이다.

기자 : 상대 팀이란 김보수 선수의 소속 팀을 말하는 건가?

이진보 : 답변하지 않겠다. 다만, 지금 이 기자회견장에서 찔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자 :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바란다.

김보수 : 이진보 선수와 나는 사실 사적으로 친하며, 나이는 어리지만 배울 것이 많은 후배다. 2년 전에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도 있다. 선수로서의 평가는, 같은 팀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단지 마라톤 외적인 재능이 더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진보 : 김보수 선수는 평소 존경하는 형님이자 선배다. 많은 분들이 앙숙이다 라이벌이다 이런 오해를 하시는데 경기장 밖에서는 절친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유독 국내대회에서만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향이 있어서 ‘국내용’이라는 찬사를 받는 분이다. 그래서 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 선발을 앞둔 현 시점에서 후배인 내 어깨가 더 무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김보수, 이진보 : 좌우지간 우리는 친한 형 동생 사이다.

기자 : 허헉!!!!

#상상3 - 부정행위 논란에 휩싸인 중마 우승자 박꼼수 선수 기자회견

기자 : 1위로 골인했지만 레이스 중반에 코스를 이탈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결국 시상 보류라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명을 부탁드린다.

박꼼수 :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레이스를 했다는 말씀을 일단 드린다. 초반 후미그룹에서 달리다가 후반 역주를 통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의 전부다.

기자 : 코스 이탈 의혹에 대하여 전면 부정하는 것인가?

박꼼수 :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기자 : 코스이탈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박꼼수 :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음해다. 우승을 놓친 선수들의 유치한 억지 주장이다.

기자 :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진상조사위를 꾸려 조사할 방침이라고 하는데?

박꼼수 : 상위단체인 대한체육회에 억울함을 호소하겠다.

기자 : 대한체육회는 대한육련 진상조사위를 관리감독할 예정이라던데?

박꼼수 : 관계기관보다는 대회 주최 측의 판단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 : 주최 측 대표도 진상조사위원으로 참여할 계획이라던데?

박꼼수 : 좌우지간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 뿐이다. 무조건 나는 결백하다.

기자 : 아, 방금 확인된 바에 의하면 경찰이 CCTV 자료를 확인했다고…

박꼼수 : 크흐흑~ 우발적으로 딱 한 번 실수한 것이다. 이번만 눈감아주시면 앞으로는 절대로…

기자 : 허허헉!!!!!!!

이거 이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실제 우리나라의 마라토너들은 이따위가 아니고 정정당당하니까 참 다행이다. 마라톤 마니아로 유명한 여야 정치인 여러분, 정치 지금처럼 하려면 대회장 나오지 마시라. 같은 주로에서 같은 공기 마시며 뛰는 거 불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