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7]
동호회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선거의 추억’ (하)

<상 편에 이어>

“아~ 정말 호박씨랑 둘이 술 먹는 거 오랜만이네. 그죠? 허허허허허허허허허.”
분명 둘이서 술 먹는 게 처음인데 그는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뜬금없이 길게 웃어댔다. 쓸데없는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본론이 시작됐다.

“그나저나 어때요? 분위기가. 뭐 나야 회장 이까짓 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 동호회 회장이란 자리가 절대로 가벼운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참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나한테 기대를 걸어주고 계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고 해서 말이죠. 그쪽 분위기는 어떤가 뭐 그런 궁금증이 문득 들어서 제가 지나던 길에 전화를, 실례 무릅쓰고 이렇게 드린 겁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때만이 아니라, 단 둘이 있을 때도 말이 장황한 사람이란 걸 새롭게 알 수 있었다.

“그쪽이란 게 정확히 누구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허허허허허허허허허… 뭐 그 뭣이냐… 호박씨를 중심으루다 그 뭐랄까 형성이 돼가 있는 그 세력, 세력이라면 좀 그렇지만 그 바운더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우리 클럽의 좋은 여론을 항상 형성하고 계시고…….”
많은 회원들 놔두고 나를 왜 찾아왔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몇몇 회원들에게는, 적어도 홍길동 회원(혹은 후보)에게는 내 술친구들이 일종의 세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이구, 난 또 뭐라구. 그 맥주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냥 술 좋아하니까 자주 모이는 것뿐이지 그게 뭐 여론을 형성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괜한 오해 받기 싫어서 산 타는 것도 그만 뒀는데요.” (한때 소모임으로 산악회를 만들어 활동했었다)

“아유~ 물론이죠. 아주 순수하게 모이시는 거 왜 모릅니까? 단지 저는, 지금 여론을 수렴해야 하는 입장인데 어디서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 클럽을 움직이는 주축 중 한 분인 호박씨한테 자문을 구하는 차원인 거죠.”
“다시 말씀 드리지만 모임이 아니구요, 제가 알기론 그분들이 딱히 누구를 좋게 생각하거나 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거 전혀 없습니다. 일단 회장선거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좀 퉁명스럽게 말하곤 조금 미안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는데, 오히려 긴장이 확 풀린 얼굴이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치킨과 맥주를 더 시켰다. 술기운이 웬만큼 오른 홍길동 후보는 한 단계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 우리끼리 말이지만, 우리 동호회 이거 절대로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거 아닙니다. 마라톤에 대한 사랑, 열정, 그리고 많은 회원들의 뜻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이끌어야 정말 평탄하게, 모 나는 데 없이 길게 갈 수 있어요. 그렇잖습니까?”
“그렇죠. 우리도 제법 년수가 있는데 회장 잘 뽑아야죠.”
“그러게나 말입니다. 임꺽정 씨는 딱 오락부장 스타일인데 지금 등 떠밀려서 후보가 돼 가지구 참 난감할 거예요. 저번에도 보셨지만 회식자리에서 술 분위기 이끌면서 회원들 스트레스 쫙 풀어주고 그러는 거에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포지션을 맡아야 한다 이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뭐냐 술도 자제 못하고, 물론 저도 술은 좋아합니다만 참 회원들 앞에서 가끔 큰 실수 하시고 그러니 좀 그렇잖아요?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만….”
“…….”
내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그가 다급했던지 승부수를 던졌다.“
“저는 호박씨가 훈련부장감이라고 생각해요. 행정적인 면과 또 그 현장실무적인 면에서 같이 공조를 하면 궁합이 잘 맞지 않겠습니까?”
아… 직장생활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스카웃 제의란 걸 받아보지 못했던 내가 생애 첫 제의를 이런 식으로 받게 되다니. 한편으론 기쁘면서 다른 한편으론 참 기분이 개떡 같았다. 젠장, 이딴 동호회 회장이 뭐라고 야밤에 따로 만나 밀담까지 나눈단 말인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풀려고 동호회 활동 하는 건데 왜 이 안에서까지 서로 눈치를 보고 정치를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줄 수가 없고, 홍길동 씨는 더 이상의 떡밥을 던질 수 없기에 서로 쓴웃음만 지으며 술을 축내다가 헤어졌다.

며칠 후 주말 장거리훈련 날. 그 날이 하이라이트였다. 모임 장소에 갔더니 이미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열심히 스트레칭 하고 있을 회원들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본 회원 몇 명이 다가왔다.
“호박씨, 홍길동 선생이랑 얘기 다 됐다며? 언제 말을 맞췄대? 우린 아직 못 정했는데 말이야. 요 며칠 양쪽에서 아주 난리야. 전화 막 오고.”
“말 맞춘 거 없어요. 만나기만 한 거지. 내가 언제부터 회장 선거에 관심 있었습니까?”
내가 펄쩍 뛰자 그들은 조금 머쓱해 하며 정황 설명을 해주었다. 아마 주중에 두 후보가 제법 많은 회원들을 만난 모양이었다. 나에게 한 것처럼 한 자리 만들어주겠다는 식의 제의를 하면서 자기 편 만들기에 열을 올린 듯했다. 그뿐이면 그나마 괜찮겠는데, 서로 흠집 내는 발언을 공공연히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고 했다. 하긴, 나랑 술 마시며 한 얘기도 임꺽정 후보가 들었으면 가만 있을 수 없는 말들 아니었던가.

분위기가 엉망인 상태에서 어수선하게 훈련을 하고 두부집에 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두 후보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눈을 내리깔고 있고, 그 주변에 앉은 회원들이 불편한 심기를 대신 전했다.
“거 같은 클럽 회원들끼리 조금 심한 것 같습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할 일이지 왜 뒤에서 험담을 해요? 이거 꼭 짚고 넘어갈 일입니다.”
“마찬가지잖아요? 뭐 술버릇 이런 것 가지고 뒷담화 하고 말이죠. 그 참 회원들 찾아다니면서 로비 하고 그게 뭡니까?”
양쪽 진영이 본격적으로 붙을 태세를 취하자 선거에 별 관심이 없던 회원들 표정이 찌그러졌다.
“아 진짜 아까부터 왜들 그래요? 이게 솔직히 줄반장 선거나 마찬가진데 왜들 그렇게 싸워? 이딴 식으로 하려면 둘 다 그만 둬요.”
“옳소~ 후보 추천할 때도 미리 알리지도 않고 지들끼리 해버리더니 이게 무슨 추탭니까?”
불만 있던 회원들의 발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두 후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식당 주인 역시 놀라서 우리가 앉은 단체석 쪽을 기웃거렸다.

상황을 정리한 건 왕고문님이었다. 창단멤버인데다 연세가 워낙 많기에 예우 차원에서 ‘왕고문’이라 칭하는 그분이 한 마디 하겠노라며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평소 지극히 온건하고 말수가 없으며 이렇다 할 자기 의견도 없는 분이었기에 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여러 말 안 하겠습니다. 이거 선거 다시 합시다. 이렇게 치열하게 할 거면 국회의원 선거처럼 절차 다 밟아서 제대로 해요. 그리고 회원들이 양해해주신다면 새 회장 뽑을 때까지 내가 회장대행을 맡았으면 합니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어차피 선거를 강행하다가는 감정의 골만 깊어질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두 후보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다른 회원들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왕고문님이 회장 대행을 맡겠노라 했을 때 나는 의외의 발언이라고 생각했지만 머지않아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름뿐인 회장이 됨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원천봉쇄해버렸던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영국 황실 같은 역할이랄까?
우리 동호회는 그때부터 한동안 훈련부장과 총무 같은 실무자만 두고 ‘집행부’가 사실상 공백인 채로 운영됐는데 의외로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전엔 회장이나 부회장이 왜 필요했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말이다. 그 사이 홍길동, 임꺽정 후보는 다시 평범한 회원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이듬해 연말 제3의 회원이 등 떠밀려 억지로 수락하는 ‘훈훈한 방법’으로 신임 회장이 됐다.

Writer's Profile
필명 호박씨, 40대 중반의 (자칭)중상급자 러너다. 밀레니엄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해 ‘길고 가늘게’마라톤을 해왔다. 10여 년간 마라톤 현장을 누비며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웹매거진 클럽마라톤에 독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