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6]
동호회를 파국으로 몰고갔던 ‘선거의 추억’ (상)

이번 총선 방송을 보고 있노라니 몇 년 전 동호회 선거가 생각나 한참 추억에 잠겼더랬다. 국회의원 자리 하나를 가지고 사생결단 하고 달려드는 정치인이나 동호회 패권을 놓고 아귀다툼하는 러너들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따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순수한 러너들을 정치인과 한통속으로 몰아가느냐고? 어허,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당시 우리 동호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어느 초가을 주말, 훈련을 마치고 들른 뼈해장국 집에서 분쟁은 시작됐다. 밥 다 먹고 트림이 올라올 즈음 고문님이 일어나 선거 얘길 꺼냈던 것이다.
“현 회장대행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새 회장을 뽑아야 됩니다. 아시다시피 전임 회장이 불미스러운 일(돈 문제로 잡음이 조금 있었다)로 물러나고 OOO 회장대행께서 아주 수고를 해주셨는데요, 이제 다시 우리 클럽의 수장을 선출하는 거니까 추천들을 해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홍길동(가명) 회원을 추천합니다” 번개 같은 발언에 “재청합니다” 후속타가 이어졌다. 뒤이어 “임꺽정(가명) 회원을 추천합니다” 누군가가 급하게 외쳤고 “재청합니다” 맞장구가 나왔다.

자리는 대충 박수 치고 마무리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보 선출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회원은 거의 없었다. 그저 회장 될 만한 사람이 후보로 나왔겠거니 하는 심드렁한 반응들이었다. 사실 마라톤클럽 회장이란 게 뭐 대단한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권력도 아니잖은가. 게다가 회장입네 하고 한 턱 쏴야 할 일도 늘어날 것이므로 굳이 탐낼 자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회원들 생각은 그랬다. 그러나 두 명 후보들의 생각은 전혀 딴판이었던 모양이다.

“자, 제가 오늘 이렇게 조촐한 자리를 마련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 회원님들이 회장 없는 불안정한 집행부 하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겠는가 하는 점을 위로하고, 또한 제 소신을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후보 추천이 있고 나서 며칠 뒤 회식자리에서 홍길동 회원이 말을 꺼냈다. 그냥 훈련 끝나고 갖는 회식인줄 알았는데 실은 그가 사는 자리였던 것이다. 따로 연습이라도 한 건지 그의 말은 장황하고 유창하며 끊임이 없었다. 좌우지간 앞으로 다 뜯어고쳐서 회원 모두가 기록단축을 할 수 있도록 이끌겠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데 장시간 연설이 끝나고 한 회원이 퉁명스레 반론을 제기했다.
“듣자니까 좀 그렇네요. 회장님 나가시고 등 떠밀려서 그 자리를 맡아주신 분한테 지금까지 ‘회장대행’ 꼬리표를 달아놨던 것도 미안한 일인데, 이제 임기 끝나는 마당에 뭐 엄청 과실이 많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연설 후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홍길동 회원도, 그리고 무심하게 듣고 있던 다른 회원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네. 맞는 말이네.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운영돼 왔는데 너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구만. 말 나온 김에 우리가 보답할 방법을 이 자리에서 논의해 봅시다!”
또 다른 회원의 발언에 의해 좌중은 왁자지껄 토론장으로 변했다. 감사패를 만들자,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해야 한다 등의 아이디어가 난무했고 ‘회장대행’은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만류하는 시늉을 했다. 물론 홍길동 회원의 표정은 침통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이번에는 임꺽정 회원이 한 턱을 냈다. 단체로 대회에 참가한 뒷풀이를 그가 마련했던 것이다. 테이블마다 바글바글 전골이 끓는 와중에 그는 소줏병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연설 대신 맨투맨 전략으로 나선 듯했다. 임꺽정 회원은 원래 술자리 언변이 좋았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데다 마라톤에 관한 상식도 풍부해서 늘 새롭고 재미있는 얘기를 풀어놓는 술자리 주인공이었다. 단점이라면 술을 좀처럼 자제하지 못한다는 것. 취기가 도도해지만 말도 거침이 없어지고 해서 종종 잡음을 일으키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니까 쉬발 마라톤대회 하는 쉐끼들 군대를 다시 보내야 돼요. 아우 그냥 돈만 따박따박 받아 처먹고 서비쓰는 형편이 없다니까. 니미… 내가 돈 벌어서 내가 메이저대회 할까요? 히히히히.”
다른 손님들이 자꾸 눈치를 주는 통에 회원들의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이 지긋한 회원들 표정이 구겨졌다.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 메이커지만 주사가 심한 임꺽정, 꼼꼼하고 체계적이지만 말실수 때문에 인심을 곧잘 잃는 홍길동. 둘 다 개성이 뚜렷한 후보였기에 회원들의 호불호도 쉽게 갈렸다. 선거 따윈 관심 없다던 회원들도 슬슬 두 후보의 경쟁구도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선거 유세’가 시작된 지 2주일 정도 지났을까. 저녁훈련을 마치고 9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홍길동 회원에게 전화가 왔다.
“저기… 아까 미처 얘기를 못 한 게 있는데, 잠깐 앞에 OO치킨에서 뵐 수 있나요?”
워낙 가까운 곳인데다 호프 생각도 간절했기에 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하 편에 계속>

Writer's Profile
필명 호박씨, 40대 중반의 (자칭)중상급자 러너다. 밀레니엄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해 ‘길고 가늘게’마라톤을 해왔다. 10여 년간 마라톤 현장을 누비며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웹매거진 클럽마라톤에 독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