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5]
치사하게 입상을 노렸던 나는… 꼼수다

군대 추억도 쫄병 때의 것들이 한결 재밌듯이 마라톤 에피소드도 초보자 시절 것이 감칠맛 나기 마련이다. 어느덧 연재 15회차를 맞은 ‘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엔 마라톤 입문 4년차 초보 시절의 일화를 소개해본다.

아, 입문 4년차가 어째서 초보시절이냐고? 내 경우엔 그렇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다 초보취급을 했고, 나로서도 부정할 근거가 없었으니까.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체계적으로 꾸준히 하지는 않고, 기록을 위해 음식섭취나 사생활을 조절하지도 않으며, 음주와 흡연도 거리낌 없이 하는 러너였다. 그저 몸 근질거리면 뛰고, 때 되면 한 번씩 대회 나가고, 운 좋으면 기록도 조금씩 당기는 식이었다. 따라서 대폭적인 기록 단축이나 서브쓰리 뭐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으며 입상 같은 건 꿈조차 꾸지 않았다. 대부분의 러너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왜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주제에 욕심이 솟아나는 것인지. 늘 마음을 비우고 뛰는 나였는데, 그날은 분명 욕심꾸러기 귀신의 씌었던 게다.
회사 업무를 하다가 무심코 참가신청을 한 대회였다. 제목이 아마도 ‘한-필리핀 친선마라톤’이었던 것 같다(이후 비슷한 이름의 다른 대회도 있었다. 그와는 다른 소규모 대회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의 친목을 다진다는 취지의 소규모 대회. 참가비도 반값이고, 대회 끝나면 도시락도 준다기에 클릭질을 했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날짜가 됐기에 대회에 참가했는데, 대회장에 가보니 영 마라톤대회 꼴이 아니었다. 딱 보기에도 마라톤을 경험해본 이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무슨 봉사단체에서 온 한국인 아주머니 아저씨들, 대학교 봉사동아리 학생들, 그리고 필리핀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들… 특히 필리핀 참가자들은 러닝화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이가 많았고, 청바지에 반팔 남방을 입고 온 아이도 있었다. 참 이런 대회도 다 있구나 싶었다.

내가 참가한 것은 5km 종목. 대략 600~700명 정도가 뛰는 것 같았다. 만만한 종목이라선지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참가자가 유난히 많았다. 필리핀 어린이들은 대부분 5km 종목을 선택한 듯했다.
몸을 풀면서 출발선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내가 맨 앞이었다. 국내 마라톤 동호인이 많이 참가했다면 빠른 주자들이 이미 앞줄을 선점했을 터이지만, 봉사단체 소속 한국인과 필리핀 노동자들이 머릿수를 채우다 보니 다들 앞쪽에 서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거 잘 하면 입상도 가능하겠는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나보다 많이 뛰어 본 이가 없는 것 같고, 제법 복장을 갖춘 참가자도 결코 고수 급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다른 주자들이 분위기 파악 하기 전에 먼저 쭉 치고 나가면 의외로 쉽게 입상권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5km 종목이야 어, 어 하다 보면 끝나는 게임 아닌가 말이다.

내 승부욕을 자극한 게 또 있었다. 바로 방송용 ENG카메라! 케이블채널에서 나온 것 같은데 오토바이 뒤에 카메라맨이 거꾸로 탄 채 바주카포 같은 ENG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뭐 솔직히 우리 같은 일반인이 방송 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단 말인가. 게다가 마라톤 중계방송에 나오는 건 모든 러너들의 로망 아닌가 말이다.
“네~ 오킬로 종목, 우리 한국 참가자가 선두를 달리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저 정도면 준 선수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캐스터와 해설자의 맨트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탕!‘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나는 치타처럼 튀어나갔다. 앞에 선 수천 명의 주자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가 슬슬 기어나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출발이었다. 약간 앞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가 넘어지듯이 가운데 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엘리트스러운 출발!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멋있었다. 선두 오토바이는 빠른 출발 속도에 놀란 듯이 웽~ 소리를 내며 거리를 벌렸다.
아 이럴수가. 내가 선두였다. 앞에는 오직 선두오토바이만 있고, 뒤에는 온통 추격자들의 발소리만 가득한 외로운 선두!! 이게 선두의 맛, 일등의 맛이로구나~! 이 맛을 보려고 황영조와 이봉주와 게브르셀라시에는 죽도록 뛰고 또 뛰었던 게로구나. 나 호박씨, 오늘 이후 입상을 노리는 고수 러너로 거듭나리라!!

참으로 벅찬 감동을 느끼며 경쾌하게 선두를 질주했다. 약 100m 정도 달렸을까? 갑자기 오른쪽에서 후닥닥닥 소리를 내며 누군가 튀어나왔다. 갈색 피부를 가진 필리핀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갓 중학교 들어간 정도로 보이는데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막 내달리는 것이었다. 주법 무시, 페이스 무시, 리듬 무시였다. 하지만 빨랐다. 절대 따라가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비슷한 또래 아이가 깔깔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통에 심기가 불편했다. 가뜩이나 무리스러운 스타트 때문에 숨이 차는데 동네에서 뛰노는 복장으로 참가한 필리핀 아이들에게 추월당하니 정신적인 충격도 컸다.

다시 두 명의 필리핀 청년들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앞질러갔다. 물론 따라갈 수 없었다.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한국 참가자들도 잰 걸음으로 나를 추월했다. 따라갈 수 없었다. 이미 오버페이스였다. 입상이고 나발이고 한 템포 늦춰야만 견딜 수 있을 듯했다. 페이스 다운을 했는데도 힘들었다. 한 번 놀란 심장은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벌렁거렸다.
또 두세 그룹이 나를 제치고 달려 나간 뒤 나는 한 템포 더 늦춰야 했고, 그와 동시에 다른 주자들이 우르르 앞서나갔다.

반환점을 돌 때쯤 나는 대략 70% 이상의 주자들에게 추월당했다. 초반 오버페이스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고 내 육체를 괴롭혔다. 어깨와 목이 단단히 뭉치고 심장은 쿵쾅거렸고 다리는 쥐가 나기 직전이었다.
지옥 같은 30여분을 보내고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결승점을 통과할 때, 내 옆에는 커다란 선캡을 착용한 아주머니가 해맑게 웃으며 흐느적 흐느적 골인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골인하는 순간, 5km 종목은 기록 측정은 안한다는 사실이 어쩜 그리도 감사하던지. 입문 4년차 철부지 러너의 가당찮은 입상 욕심은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Writer's Profile
필명 호박씨, 40대 중반의 (자칭)중상급자 러너다. 밀레니엄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해 ‘길고 가늘게’마라톤을 해왔다. 10여 년간 마라톤 현장을 누비며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웹매거진 클럽마라톤에 독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