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2]
일반인들은 이해 못하는 ‘러너들의 상상’

사람의 나이 듦이란 상대적이다. 직업이나 건강상태, 주위 환경에 따라 실제보다 나이 든 행세를 하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나이보다 젊게 산다. 몸으로 부딪치기 좋아하고,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고, 떠들거나 허풍 떨기를 좋아한다. 꿈 많은 사춘기 아이들처럼 공상도 많이 한다.

언젠가 동호회원들과 술을 마시면서 저마다 혼자만 생각하며 즐거워했던 공상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마라토너들만의 기발한 상상’을 주제로 한바탕 토크쇼를 벌였다고나 할까? 그 때 오고 간 얘기들 중 기억에 남는 건 대략 이런 것들이다.

1 운이던 실력이던 마라톤대회에서 입상하는 상상
다들 이런 생각 해봤죠? 객관적으로 보면 어림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막연하게 상상해보지 않나요? 어떤 계기로 훈련을 아주아주 열심히 하고 음식조절도 잘 되고, 게다가 대회 당일 컨디션도 너무나 좋은데 내가 참가한 코스에 고수들이 전혀 참가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초반부터 탁 선두권으로 치고 나가서 두세 명과 시종일관 경쟁을 벌이다가 골인지점 근방에서 단독으로 치고 나가는 거예요. 몸 좋아 보이는 경쟁자는 내 뒷통수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다가 마지막 스퍼트가 달려서 처지는 겁니다. 기록이야 뭐 좋겠어요? 입상을 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간혹 보면 지방 대회에서 터무니없이 저조한 기록으로 입상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 기회가 나한테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 정말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2 동료 뜀꾼들과 함께 날치기 때려잡는 상상
좀 유치한데 말이죠. 이런 상상 가끔 해요. 어느 건장한 청년이 노인의 가방을 훔쳐 달아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노인이 울트라마라토너인거죠.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한 번 뛰면 하루종일 뛸 수 있는 체력이 있겠죠? 물론 청년은 노인네가 따라오면 얼마나 따라오겠는가 싶어 여유있게 달아날 거고요. 그러나 추격전은 금방 끝나지 않아요. 상대가 울트라마라토너니까요. 게다가 설상가상 다른 러너들이 같이 쫓아옵니다. 노인이 친한 동호회원들을 호출한거죠. 5km 스피드가 좋은 젊은 주자, 실력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서브3 주자, 밀고 당기기에는 도가 튼 페이스메이커 전문 주자까지 종합선물세트로 따라옵니다. 날치기 청년은 죽을 맛이죠. 벌써 한 시간째 도망가고 있는데, 태어나서 그만큼 오래 뛰어 본 적이 처음이죠. 아직 젊은데다 사정이 급하니까 뛰고 있지만 곧 쓰러질 것처럼 힘이 들 겁니다. 러너들이 거리를 점점 좁혀옵니다. 이내 빙 둘러싸고 주구장창 뒤따라 뜁니다. 한시간 반 동안 도망치던 날치기 청년은 체력이 다해서 결국 기절하고 맙니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달리기 실력 하나로 날치기를 잡는 거죠. 정말 짜릿할 것 같지 않아요?

3 메이저대회에서 엘리트 선수와 나란히 달리는 상상
우리나라는 엘리트랑 마스터스랑 따로 출발하니까 불가능하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잖아요? 얼마 못 가 퍼지더라도 잠깐이나마 엘리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는 것 말입니다. 이봉주나 지영준도 좋고, 한창 잘 나가는 흑인 선수들도 좋고, 게브르셀라시에 같은 마라톤 영웅이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고수 분들은 간혹 후미로 처진 여자선수들을 추월하는 경우도 있다죠? 드물지만 남자선수를 앞지르는 경우도 있다던데, 정말 짜릿할 것 같아요. 한 순간만이라도 탁 제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 기분은 굉장하지 않을까요?

4. 해외 유명 대회에 참가하는 상상
돈 많고 시간 많아서 해외여행 척척 가는 분들에겐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겠으나, 대다수 평범한 직장인들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라톤 한 번 뛰겠다고 보스턴이나 런던에 가는 것도 마누라가 경악할 일이거니와, 설령 이해를 해준다 하더라도 회사에서 짤릴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물론 보스턴마라톤의 경우엔 기록가지 받쳐줘야 하지요. 그래서 종종 상상을 합니다. 먼 이국땅에서 열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태극기 붙인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입고 세계 각국의 러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장면을 말입니다. 러너들에겐 휘황찬란한 고급 패키지 여행보다 훨씬 감동 넘치는 해외여행 아닐까요? 

5 딴 거 다 필요 없다! 서브3 달성하는 상상!!
뭐니 뭐니 해도 서브3 달성하는 상상이 제일 짜릿한 것 같아요. 서브3라는 건 말이죠,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열매처럼 사람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현실감이 있어서일까요? 정말 어려운 경지지만, 죽도 록 연습하면 못 할 것도 없는 거잖아요. 십여 년 전까진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달성하는 기록이었지만, 지금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벽을 넘고 있으니까 점점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목표로 다가오는 거지요. 물론 과학적으로 검증해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달성 못 할 사람들이 제법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중요하죠. 몇 초 차이로 결승선을 넘어 서브3를 달성하는 순간을 늘 꿈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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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마라톤 중독지수 테스트

1> 이틀 이상 달리지 않으면 찝찝하고 불안하다
2> TV나 라디오에서 ‘마라톤’이란 단어가 나오면 일단 귀를 기울인다
3> 드라마나 영화에서 마라톤 장면이 나오면 사실성 떨어지는 부분을 바로 지적할 수 있다
4> 사적인 인간관계의 50% 이상이 마라톤 때문에 만들어졌다
5> 직장동료, 아내, 자녀, 친구 등에게 주기적으로 마라톤을 권하고 있다
6> 혹서기와 혹한기를 제외하면 매달 대회에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7> 설과 추석을 제외한 연휴에는 대회에 나가거나 동호회 모임에 나가도 미안하지 않다
8> 마라톤을 하지 않는 동년배들과의 대화는 지루하다
9> 동호회 행사를 위해 회사 업무나 가족행사는 어느 정도 희생할 수 있다
10> 러닝용품 구입비용이나 대회 참가비용은 전혀 아깝지 않다

※ 8개 이상이면 심각한 중독, 6개 이상이면 중독, 4개 이상은 위험수준, 2개 이하는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