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1]
흑룡의 해를 망친 신년새벽酒 (하)

<상 편에 이어>

“지금껏 여러분들과 함께 달릴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몸은 한국을 떠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회원의 한사람으로서 함께 할 것임을 약속드리며…….”
이민 가시는 고문님의 연설은 길었다. 정든 회원들 떠날 생각에 감정이 북받치는지 간간이 말을 멈추기도 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벽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저 저 상인가 뭔가 받고 냅다 튀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 다들 들으신 것처럼 고문님께서 우리 클럽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가시기 전에 우리 회원님들께 의미 있는 상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사회자 격인 총무가 운을 떼자 다른 임원들이 상장과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쟁반가지 가져와서 격식을 갖췄다. 얼핏 봐도 10여 개가 넘어 보였다. 호명하는 이름들을 보니 클럽 안에서 팀장 또는 운영위원 타이틀 가진 사람들을 다 포함시킨 듯했다. 가만있자, 나는 강화위원이었던가 훈련팀장이었던가… 뭐 아무려면 어떠랴.
어느덧 내 이름이 불려서 사람들 앞에 나가 상장과 선물상자를 받아들었다. 제법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말이다. 속으로는 꽤 묵직한 선물상자 안 물건이 싸구려 다기세트 아니면 크리스탈 장식품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제법 취기가 오른다는 생각도.

자리에 앉아서 수육을 한 점 집어먹으며 시계를 보니 10시 55분. 정말 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일어나서 나가면 11시 40분까지 귀가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다. 지하철로 한 방에 가니까. 물론 택시를 타면 더 단축될 것이다. 11시 15분에 일어나도 시간이 부족하진 않다. 별 의미는 없는 상이지만 그래도 받자마자 내빼는 건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자, 이건 제가 여러분과 잔 나누고 싶어서 준비한 겁니다. 한잔 쭉 받으시고, 저는 한 바퀴 돌아야 하니까 조금만 따라주세요.”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고 하지 아마? 고문님이 발렌타인 30년산을 따고 있었다. 어지간한 주당들도 좀처럼 엄두를 못 내는 30년산을 해장국집에서 수육 앞에 놓고 먹게 되다니. 게다가 싸구려 술로 전작을 한 상태에서!!!
이미 양주 먹으면 아내에게 술 냄새를 들킨다는 걱정보다, 입에 착착 붙을 감칠맛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건 분명 고문님과 나누는 마지막 잔이 심금을 울려서가 아니라 발렌타인 30년산만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맛과 향에 놀라서이리라. 아~ 저런 술은 맨 정신에 안주 없이 스트레이트로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건데….

드디어 나에게 잔이 왔다. 양주잔보다 조금 더 들어가는 소주잔이 반가웠다. 쪼르르르륵. 30년산의 희망찬 광명의 소리. 21년산이 흉내 낼 수 없는 그 소리. 주당의 알콜 본능을 뿌리부터 일깨우는 찬란한 맛!! 그 한 잔을 목구멍으로 다 넘기는 순간,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걸 직감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11시 40분이라는 데드라인이 내 목을 졸랐지만, 고급 알콜 한 잔으로 부족했던 알콜 농도를 맞추자 무한한 희망과 용기가 샘솟았다.
시간이 부족하면 빨리 먹으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휴일인데 조금 취한들 어떠하리. 어차피 늦은 점심 먹을 건데 조금 더 늦게 출발하면 어떠하리. 고문님을 비롯한 회원들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쭉쭉 들이켰다. 나누는 얘기는 왜 그리 재밌는지. 서브쓰리 실패한 얘기며, 첫 풀코스 뛴 얘기며, 대회장에서 겪은 황당 경험담들이 개그콘서트보다 더 재미있었다. 집에서 아내와 나누는 얘기라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나 ‘노후생활에 대한 진지한 고찰’ 또는 ‘다양한 내 실수에 대한 문책’ 정도가 전부이지 않던가. 그에 비하면 마라톤 얘기는 어쩜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소재도 다양할까. 그리고 그 얘길 하면서 털어 넣는 소주는 왜 그리도 달콤할까(물론 발렌타인 30년산을 계속 먹는 게 더 좋지만^^).

영영 오지 말아야 할 11시 15분이 드디어 왔다. 그러나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 좋은 자리를 왜 끝내야 하는가. 가족과의 점심을 아주 조금 늦춘다고 큰일이라도 일어나는가? 앞으로 영영 보지 못 할 고문님과의 마지막 자리이거늘.
낮술은 부모도 못 알아보게 한다 했던가. 어느새 나는 태연자약하게 벽에 기대어 술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2차라도 갈 기세로 술을 더 시키고 술국을 추가하고 그랬다.
“자~ 아쉽지만 다들 오후 스케줄도 있으실 테니까 이제 그만 일어들 나십시다.”
결국 자리가 파한 후에야 해장국집을 나왔다. 12시 5분. 에휴~ 이 일을 어쩐다. 집에서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게 더 불안했다. 그러나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라 뒤늦게 서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헛기침 하며 현관문을 열자 마침 거실에 있는 마눌님.
“어, 왔어?”
아내는 짜증내지 않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 정도 늦을 줄은 애초에 예상했다는 듯이.
“11시 40분까진 오신다면서?”
“히히… 시계가 고장 났나? 막 서두른다고 서두른 게 이 모양이네”
“빨리 준비해”
나를 가까이 지나쳐 주방으로 가던 아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악마의 얼굴이었다.
“뭐야. 술 먹었어?”
“…쪼, 쪼금”
“쪼금이 아닌데 뭘. 술 냄새가 확 나는구만!”
“아니, 고문님이 이민 가신다 그래가지구 먹은 거야. 나 멀쩡해. 하나도 안 취했어.”
“얼마나 먹었길래? 말해봐, 솔직하게 말해봐”
“이사람아, 먹어봤자 한병 조금 더 먹었지. 내 주량에 비하면 암것도 아니지.”
“주량이 문제가 아니라 운전을 못 하잖아!! 나들이 가는데 대리운전 불러가지고 갈까? 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적한 데 데려가겠노라 해놓고 술을 쳐 잡수셨으니… 그러나 포기도 빠른 아내인지라 잠시 후 “여하간 옷 갈아입고 나오라”며 상황을 마무리해 주었다.

아주 근~사할 뻔한 나들이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해물찜집에 가는 걸로 축소 수정되었다. 나는 얌전하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정말 조금만 마신 거 맞지?”
아내는 재차 확인을 하고는 해물찜 중짜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종업원이 가져오는 처음처럼 병을 보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아이고, 이 벼락 맞을 주당 본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