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10]
흑룡의 해를 망친 신년새벽酒 (상)

설 명절에는 마누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조금 고까운 일이 있더라도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그게 결혼생활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내가 어겼다. 참 어리석게도 말이다. 지금부터 지난 신정(양력 1월 1일)에 내가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재앙을 자초한 얘기를 지금 털어놓으려 한다. 발단은 12월 중순 송년회 자리였다.

“이천십이년을 그저 떡국이나 처먹으면서 보낼 수야 있나요? 우리 신년번개달리기 한 번 합시다. 이의들 없으시죠?”
사실 나는 이의가 있었다. 마누라와 선약이 있었으므로. 그런데 다들 미친 건지 ‘참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치는 게 아닌가. 나도 엉겁결에 찬동을 했으나 참 걱정스러웠다. 아니 다들 정초에 달리기 약속을 잡는 게 가능하신 건가? 술 깨고 딴소리들 하는 거 아닌가? 이상도 하여라…….

“저기 곤란한 분들 미리감치 손 들어보세요. 딴죽 걸지 않고 호쾌하게 열외 해 드립니다. 호박씨 회원님은 어떠세요. 마눌님이 허하시겠습니까?”
“참 별 소리 다 하시네.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 나도 찬성표 한 장 던지겠습니다.”
말을 해놓고 내심 반대 의견이 반수 이상 나와 주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만장일치에 가깝게 ‘가결’이 된 것이다. 이런 망할. 또 꼬투리 잡힐 건수가 생겨버렸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마눌님에게 차분히 털어놓았다. 새벽같이 나갔다가 금방 다녀오겠노라고. 그냥 평소에 하던 새벽운동이랑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니 신경쓰지 말라고. 그러나 마눌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한테 진짜 이딴 식으로 할 거야? 근사한 데서 밥 먹자더니, 약속을 따블로 잡으면 어떡해? 언제 들어오려고!!!”
“아 이사람아, 그냥 새벽달리기 하고 오는 거라니까. 와서 바로 씻고 나가서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착착 계획이 서 있다니까. 좀 믿어 봐.”
“알아서 하셔. 두고 보겠어.”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뻔해보였기 때문. 송년회 술자리에선 다들 좋다고 의기투합을 했지만 막상 몇 명이나 나올 것인가. 적으면 서너 명, 많아야 예닐곱 명일 것이다. 억지로 나온 사람들은 참 괜한 약속을 잡았다며 머리를 긁적일 것이다. 몸이나 녹일 겸 한 5~6km 뛰고는 해장국집에서 한 그릇 훌훌 떠먹고 헤어지게 될 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이었기에 안심이 됐다.

1월 1일, 약속시간인 6시에 맞춰 나가보니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줄잡아 30여 명이나 나와 몸을 풀고 있는 게 아닌가. 여성부장은 사다 놓고 몇 번 쓰지 않던 들통과 가스버너까지 들고 나와 오뎅국을 끓이고 있었다. 낭패였다.
“어이, 호박씨~ 뭘 그렇게 꾸무럭거려? 빨이 이리 와서 몸 풀어요. 장거리 팀은 정각에 출발할거야.”
“장거리요? 얼마나 뛰길래요?”
“날도 추우니까 25킬로만 뛰려고.”
“…….”
“뒤에 18킬로랑 10킬로 팀도 있으니까 거기 따라가든지.”
“하… 네….”
“히~임!!”

기가 막혔다. 다들 서브쓰리라도 하려는 것일까? 정초부터 왜들 오바하시는지. 평소엔 설렁설렁 뛰다가 대충 시간만 때우고 식당으로 내빼는 인간들이 왜 갑자기 성실모드로 바뀌었느냔 말이다.
10km 팀 끝에서 달리며 시간을 계산해 봤다. 25km 팀이 들어오면 2시간 반. 스트레칭 하고 오뎅 먹고 뒷정리 하면 삼십분. 해장국집 가서 밥 먹으면 1시간. 집에 가는 길 30분. 번개같이 준비하고 나와 밟으면 점심시간 안 늦게 한적한 교외 한식당에 닿을 수 있다. 안 밀리는 길로 쭉쭉 빠져나가다가 근사해 보이는 식당에 차 박아 넣고, 마치 미리 점찍어둔 집인 양 하면 마눌님 입가에 미소가 돌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후닥닥 10km를 뛰고 들어와 오뎅국 배식 준비를 도왔다. 여성회원들의 칭찬세례가 이어졌지만 그들의 노고가 감사해서 돕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뎅국이 빨리 동나야만 자리를 파할 수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1회용 그릇 늘어놓고, 접시에 신김치 덜어놓고, 숟가락이랑 젓가락 세팅하고… 회원들이 집결지로 돌아오는 족족 오뎅그릇을 품에 안겼다.

무릎 상태가 안 좋은 채로 25km를 뛰러 간 회원이 대열에서 떨어져 처지는 바람에 훈련이 8시 45분에 끝났다. 10분간 스트레칭 한 다음에 총무가 자질구레한 전달사항을 늘어놓아 10분 까먹고, 오뎅 잔반이 많이 남는 바람에 처리하느라 정리 시간이 20여 분이나 걸렸다.
삼삼오오 차에 나눠 타고 해장국집에 집결한 시간이 9시 40분. 생각 같아선 제일 빨리 되는 메뉴로 통일했으면 싶었지만 내게 그럴 권한이 있을 리 없었다. 야속한 회원들은 메뉴도 참 다양하게 시켰다. 양평해장국 여덟 명, 황태콩나물해장국 다섯 명, 선지해장국 다섯 명, 육개장 세 명… 심지어 아침부터 팍팍하게 돌솥비빔밥을 잡숴야겠다는 회원마저 있었다. 가게 주인 인상이 구겨졌고 내 인상도 구겨졌다.

사실 밥 한 그릇 먹는 시간이야 길어봤자 얼마나 길겠는가. 문제는 분위기가 밥에 집중하는 쪽으로 흐르느냐 이야기꽃 피우는 쪽으로 흐르느냐다. 그날 분위기는 후자 쪽이었다. 올해 추위가 장난 아니라는 얘기로 시작해서 아까 뛰는데 너무 추워서 거시기가 쪼그라 붙었다는둥, 여자들은 쪼그라들 것이 없어 좋겠다는 둥 시시껄렁한 음담패설로 화제가 옮겨가는 판이었다. 설상가상, 해장국을 반쯤 비울 즈음 테이블마다 수육 접시와 소주가 놓이고 있었다.
“자아~ 이거는 오늘 김 고문님께서 우리 회원님들 신년 한 해 건강하시라고 한 턱 쏘시는 겁니다. 일단 앞에 놓인 잔에 한 잔씩들 채우세요.”

여러분도 알 것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고 끊을 수도 없는 흐름을 말이다. 먼저 한 턱 쏘는 고문님이 “희망찬 흑룡의 해를 맞이하여…”로 시작되는 축사 비스므리한 연설을 했고, 회장도 “365일 무사즐건달을 기원한다”며 한 마디 했다. 이어 훈련부장은 동계훈련 시 주의사항을 참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수육은 참 푸짐하게도 나왔다. 간만에 땀을 흘린 회원들은 해장국 그릇을 비우고도 고깃점에 욕심들을 냈다. 술도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오랜 음주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결코 간단하게 마무리 될 자리가 아니었다.

더 무르익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총무에게만 슬쩍 귀띔을 했는데 극구 만류하고 나섰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좀 있다가 시상식 한단 말이에요. 호박씨도 상 하나 받게 돼 있는데 가시면 어떡해요.”
“아니 갑자기 뭔 시상식을 해요? 연말에도 안 하던 걸.”
“아유~ 못 들으셨구나. 좀 있다 아시게 되겠지만 고문님 곧 이민 가신대요. 그래서 정초에 한 턱 쏘신다고 한 거고, 또 모임에서 수고하신 분들한데 감사패 같은 것도 돌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잠자코 앉아 계시다가 부르면 활짝 웃으면서 나오세요.”
시계를 보니 10시 35분이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는 한 11시쯤 집에 도착하여 아내와의 점심 약속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해장국과 수육과 소주까지 마신 상태라 바로 다른 밥을 먹을 자신도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여보, 오늘 피치못할 사정으로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늦은 점심 먹자. 11시 40분까지 무조건 들어갈게]

아내의 답문자 [ -_- ] 가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나는 일단 1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