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9]
나는 천하무적(?) 서브쓰리 러너다!

마라톤을 오래 하다 보니 유명 스포츠브랜드의 ‘고위 관계자’와 술자리를 하는 일도 있었다. 벌써 6~7년 전의 일이라 자세한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들었던 이야기 하나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자리가 만들어진 경위는 동호인 대상 신제품 테스트였다. 테스트용 신발은 가지라고 줬고, 그것만으론 조금 미안했던지 회사 간부가 직접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나섰다. 평일 점심에 고깃집의 넓은 룸에서 조우한 여덟 명의 러너와 한 명의 스포츠브랜드 임원.
형식상 맥주 한 순배를 돌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어떻게 어색함을 덮을 수 있었겠는가.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자 그 임원이 업계의 비화를 하나 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훌륭하신 마라토너 분들 앞에서 할 말씀은 아닙니다만, 스포츠브랜드 하다 보면 일부 몰지각한 동호인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아주 예외적인 경우죠 아무렴요. 제가 한 직영점 점장한테 들은 얘긴데 말이죠…….”

그가 맥주 3잔을 먹고 꺼낸 얘기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오전 11시쯤 본사 직영점에 운동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찾아왔더란다. 스포츠브랜드 매장은 대개 10시쯤 오픈을 해서 1시간 정도 걸레질이나 매장 정돈을 하므로 이제 막 장사 할 채비를 마친 점장이 그날의 첫 손님을 맞은 것이었다. 남자는 매장으로 불쑥 들어와서 한 바퀴 쓱 둘러보더니 이내 카운터로 와서 점장과 얘기 좀 나누고 싶다고 운을 뗐다고 한다.

“제가 점장입니다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말씀맞다나 도움을 좀 받으려고 찾아왔습니다. 허허허. 저는 딱 보시다시피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이쪽 바닥에선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서브쓰리 주자거든. 선생님은 혹시 서브쓰리가 뭔지 알고 계시나?”

극존칭으로 시작해 하대로 끝나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점장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어쨌든 적당히 대꾸하고 다음 말을 기다리니 그는 점장에게 황당한 제안을 했다.
“아유~ 그래도 마라톤에 대해서 개념은 딱 잡혀 계시네. 제가 그 서브쓰리 주잡니다. 올해 두시간 오십육분 삼십이초를 찍었고, 내년 초까지 이사구(2:49, 2시간 50분 이내 기록) 달성을 할 거고 뭐 그래요. 다 알겠지만 이 마스터스 안에서는 상위 1퍼센트 안에 듭니다 내가.”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 자랑을 연거푸 늘어놓았다.

“아… 그러시군요. 근데 제게 하실 말씀이?”
“내가 춘마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시지? 춘천마라톤 있잖어. 거기서 기록 내려고 준비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용품을 바꿔볼 생각이거든. 그래서 시합용이랑 훈련용을 나한테 제공해 주시면 내가 적극적으로 사용을 할까 합니다.”
“저 그러니까 협찬을 해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그런 건 본사에서 진행하는 거지 저희 같은 대리점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에이, 직영점인데 본사나 마찬가지지 뭐.”
“마찬가지긴요. 그냥 직영하는 매장일 뿐이죠.”
“여기 재량으로 안 되나?”
“네, 안 됩니다.”
“허 참 답답하네 내가 서브쓰리 주자거든. 내가 입고 뛰면 그게 다 홍보가 되는 거라고. 길거리에서 시민들이 보지, 또 티브이에 비치니까 전 국민들이 보지, 이게 우습게 생각할 게 아니라니까. 내가 거저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용품 협찬을 해달라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팽팽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옆에서 가방을 고르던 손님이 무심코 뱉은 말이 난장판을 만들어버렸다.
“쉽게 안 갈 것 같은데 양말이라도 하나 줘서 보내세요.”
자기 딴엔 점장에게 귓속말을 한 것인데 그만 서브쓰리 주자의 귀에도 들려버렸던 것이다. 서브쓰리 주자는 ‘니가 뭔데 사람을 거지 취급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였다. 갑작스런 상황 전개에 전의를 상실한 점장은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 본사 마케팅팀에 SOS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고객 컴플레인을 해결 못해 본사에 전화한 점장의 심정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질 만큼 상대가 막무가내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 정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업계에서 홍보와 마케팅 쪽으로 잔뼈가 굵었다는 본사 팀장이 직접 통화를 했는데, 서브쓰리 주자는 몇 마디 듣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매장을 나가버렸다. 팀장이 그에게 한 얘기는 이랬다.

“마스터스 러너에 대한 용품 협찬의 경우 제가 최종 결정을 하는 담당잔데, 아직 저보다 느린 남성 주자를 협찬한 사례는 없습니다. 제 기록이 선생님보다 10분 이상 빠릅니다. 저희 내부 룰에 맞게 기록 단축 하시면 기쁜 마음으로 용품 협찬 하겠습니다.”

참 할 말을 잃게 하는 절묘한 멘트 아닌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팀장이 마라톤은커녕 5km 완주나 몇 번 해본 왕초보 러너였다는 것. 그야말로 ‘천하의 안하무인’을 누른 ‘천하의 왕구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