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8]
마라토너 허리는 백만불짜리 허리?

얼마 전, 친한 형님이 낮 시간에 뜬금없이 전화를 했다. 인사고 뭐고 앓는 소리를 해대기에 크게 다친 줄 알았더니 맥주박스 들다가 허리를 삐끗 했단다. (요리사 출신으로, 작은 주점을 운영 중임) 병원신세를 지게 돼 가게도 얼마간 닫아야 할 모양이었다. 그는 “한 마디 할 때마다 허리가 울린다”며 “이틀 후 모임에 못 나가니 그리 알라”고는 전화를 끊었다.

허리를 다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심하면 눈알만 굴려도 통증이 온다. 그저 판판하고 딱딱한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서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치료고 뭐고 뒤척일 만한 상태가 된 이후의 문제다. 나이도 적지 않은 형님이, 그것도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 허리를 다쳤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부상이 심하지 않아서 보름 만에 그 형님의 가게 테이블에 마주앉아 소줏잔을 부딪칠 수 있었다.

“아이고, 마 죽다 살았다. 살짝 접혀뿐 거인데도 엄청나게 아픈기라. 그 자리에 주저앉은 거를 느그 형수랑 손님이 직직 끌고 병원으로 델다 줬다 아이가. 인간 허리가 이리 약한 지 이제 알았다. 니도 조심해래이. 제대로 접히문 남자구실도 몬한데이.”
연거푸 소줏잔을 꺾으면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늘 여유만만이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는 사람인데 사뭇 정색을 하는 걸 보니 꽤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거 참, 형님도… 장사 한두 해 한 것도 아닌데 어째 맥주박스 하나를 옳게 못 옮기고 다쳤어? 또 손님들이랑 한 잔 걸치고 미끄러진 거 아니야? 이팔청춘도 아닌데 몸 좀 아껴 써요. 딸린 식구들 생각해야지.”
“임마가 위로 쫌 하라고 불러 놨디마는 야단만 치고 자빠졌네. 니 헷소리 할라문 고만 처묵고 집에 가뿌라.”
형님은 공연히 테이블을 탕탕 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화풀이 하듯 용맹스럽게 안주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형님, 괜히 성질 내지 마시고 이참에 나 따라서 운동이나 해 보셔. 마라톤까지 아니더라도 슬슬 조깅만 해 봐요.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될 만큼 좋은 운동이라니까. 어디 남자가 그깟 맥주상자 하나 못 들고 허리를 삐냐구. 형수한테 미안한 줄 알어야지 크크.”
“임마 주둥이를 확 비벼뿔까잉. 마, 작살났던 허리도 침대 들가면 착 가서 붙는다 아나? 니 마라톤 쫌 한다고 머 그리 유세고? 오리지날 체력은 내가 니보다 헐 좋다 임마.”

말로는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은근히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걸 확인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아끼는 형님이 다친 건 슬퍼야 마땅하지만 평소 건강에 대해 워낙 자신하던 사람이라 조금 우스웠던 것이다. 보신탕부터 옻나무까지 몸에 좋다는 건 두루 챙겨먹는데다 마라톤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돈 벌자고 하는 운동이라며 은근히 무시하던 형님이었다. 그러니 측은지심을 가질래도 입가에 미소가 번질 수밖에.

티격태격 말다툼으로 시작한 술자리는 어느새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로 이어졌다. 술이 술을 먹고 그 술이 사람을 먹는 경지. 뭐 그 정도로 미련 없이 마시고 새벽 두 시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간 중간 필름이 끊겨가며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는 것은 생략하고 바지를 벗어 내동댕이쳤다. 나풀거리는 잠옷 바지에 발 하나를 꿰 넣고, 이어 다른 쪽 발을 쑥 넣었는데 발끝이 중간에서 걸렸다.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데 허리춤에서 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 어라? 이거 참, 근육이 놀랬나?’ 잠옷을 마저 입고 허리를 조심스레 돌려보니 허리를 오른쪽으로 구부릴 때마다 쑤셨다. 무사히 집까지 와 침대 앞에서 다치니 참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마치 허리에 어설프게 마취주사를 놓고 꼬챙이로 마구 후비는 것 같았다. 간밤에 살짝 삔 것이 실은 제법 심각한 부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토요일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주말 동안 나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열흘 이상 고생을 했다) 눈 앞이 캄캄하고 짜증이 밀려왔으나 가만 누워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간신히 TV리모컨만 만지작거리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오전 10시쯤 형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갔나? 어제는 괜히 성질 내서 미안타.
    니 말대로 학교 운동장에 나와서 몇 바퀴 뛰고 들어가는 길이다.
    기분 상쾌하니 괜찮네. 나도 은근 마라톤 체질인 갑다 ㅎㅎ

한층 강력한 짜증이 물 밀듯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