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7]
사랑하는 아내의 잔혹한 편지

아내와 나는 곧잘 편지를 주고받는다. 사실 편지까진 아니고 장문의 메모 정도랄까? 문자나 카카오톡을 이용해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손글씨 박힌 메모가 정겨운 건 두말 할 것 없다. 학창시절 짝사랑 하던 여자애한테 러브레터 보내던 기억도 나고 말이다.
나는 아내의 화장대에, 아내는 내 가방 안주머니에 메모를 넣어둔다. 주거니 받거니 답장 형식을 취하면서 그날 그날의 전달사항이나 말로 못 했던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겨운 모습인가. 물론 가끔 폐부를 찌르는 잔혹한 내용도 있긴 하다.

작년 초겨울, 호박씨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마감이 임박한 풀코스 대회에 참가신청을 했다. 운동 잘 해놓고 가을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풀코스 러너라면 찬바람 가르며 시즌 마감하는 의식을 치러야 뭔가 개운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신청을 해 놓고 아내에게 보고는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메모에 그 내용을 넣었다.


To 마나님
때 이른 한해 잘 마무리 합시다. 다사다난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한 해였던 것 같소. 20일날 풀코스 하나 신청했는데 짧은 코스 같이 뛰어도 좋겠군. 예정에 없던 것인긴 한데, 그 날 이후론 풀 대회가 거의 없어서 불쑥 신청을 해버렸소. 무사 완주를 기원해 주오.

다음날 가방 속엔 어김없이 답장 메모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뜻밖이었다.

To 서방님
사랑하는 서방님, 서방님의 열정에 감동하고 존경합니다. 날도 추워 오는데 20대 젊은이처럼 뛰신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요. 그러나 굳이 김장철을 맞이하여 풀코스를 뛰어야 함은 무슨 이유이며, 날짜를 골라도 꼭 배추 절이는 날로 고르는 건 무슨 조화인가 싶습니다. 앞베란다에 쌓여있는 배추를 서방님이 못 보았을 리 없고, 보았다면 곧 김장을 담가야 함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순간의 실수로 일을 그르치지 마시고 대회를 미루시기 바랍니다. 김장은 우리 집안의 큰 행사이니 온 가족이 힘을 합해야 할 것입니다.

허 참. 이미 4만원 결제까지 다 했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지. 하루 웬종일 나갔다 오는 것 도 아니고, 후딱 뛰고 와서 도와주면 될 일 아닌가. 나는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써가며 답장을 썼다.

To 마나님
사랑하는 아내여,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대의 뜻을 내가 몰랐구려. 하기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당신이 혼자 속으로만 계획해 놓은 일을 어찌 알아맞출 수 있었겠소? 베란다에 쌓아놓은 배추가 단서라지만 이 우매한 남편은 그게 언젠가 김치가 되겠거니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곧 절여야만 되는 줄은 차마 몰랐소. 배추에 입이 달려서 내게 귀띔을 해주지 않는 이상 어찌 찰떡같이 심중을 알아맞출 수 있었겠소?
사정이 이러하니 불편한 심경을 거두시고 요번 판은 양보하는 걸로 해주시구려. 내 아침나절에 후다닥 완주하고 와서 마당쇠처럼 일을 거들 것이오. 또한 김장 후에 안마, 청소, 설거지 등 후속 조치가 뒤따를 것임은 물론이요. 선처를 바라오.

다음날 마누라의 짧은 답장.

To 서방님
선처 못하옵니다.

다음날 나의 애절한 답장.

To 마나님
함 봐 줘잉. 일년 마무린데~ 완전 중요한 대횐데~ 결제도 다 했는데~~

다음날 마누라의 단호한 답장

To 웬수야
작작 좀 뛰셔. 한 번쯤은 나한테 양보하셔. 환불 안되면 번호표 딴 사람 주셔.

다음날 나의 최후 통첩

To 아줌마
남편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그냥 보내줄 일이지 꼭 그렇게 따져야겠음? 이왕 취미 갖는 거 제대로 해보려고 열심히 참가하는거고, 초겨울에도 한 번 뛰어야 기량이 유지되는 거고, 그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내년 봄에 입상해서 상금 듬뿍 안겨줄 지 누가 알겠음!?

다음날 마누라의 마무리

To 존경하는 서방님
마라톤을 사랑하는 서방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저도 마라톤에 대해 웬만큼은 아옵니다. 삼십 초반에 시작하여 십수년을 뛰었으면 이제 기록도 나올 만큼은 나왔을 터. 고작 3시간 30분 왔다갔다 하면서 무슨 입상을 바라나이까? 아무리 급해도 공수표 날리지 마옵소서. 뛰다가 어디 다쳤단 소리나 안 나오는 게 소녀의 바람이옵니다.
일단 20일날 대회는 허해드리겠으나 2시 반까지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늦을 경우 뒷 일은 상상에 맡기겠음)

나의 답장

To 존경하는 마나님
네ㅜㅜ

나의 2011년 마지막 풀코스 출전은 그렇게 극적으로 성사되었고, 나는 귀가시간에 늦을까봐 결리는 무릎을 질질 끌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물론 집에 와서 무릎 아프단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망할놈의 배추와 밤 늦도록 씨름했다. 아~ 인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