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氏의 마라톤 세상만사[5]
구질구질했던 나의 첫 마라톤 下

(中편에 이어)

“아유~ 선생님 포기 않고 아직도 뛰고 계시네? 괜찮으세요?”
기척도 못 느꼈는데 엠뷸런스가 옆에 붙어있었다. 두 명의 기권자를 대회장으로 나른 뒤 내 행방을 찾아 코스를 뒤진 것이리라.
“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근데 완주는 무리 아니겠어요? 그냥 요거 타고 가시죠?”
“허 참, 이제 이십칠킬로 왔는데 기권하라 그러면 어떡합니까?”
“이십칠킬로에 세시간 십오분이 지나고 있으니까 그러죠 허허.”
“아까 잠깐 쉬어서 그런 겁니다. 요 페이스로만 꾸준히 뛰면 다섯 시간 안에 들어가요.”
“허허허… 열심히 뛰세요.”

묘한 웃음을 남기고 엠뷸런스가 뒤로 빠졌다. 내 페이스가 느려선지 더 따라오지 않고 공터에 차를 대는 듯했다. 따라붙으며 부담을 주는 앰뷸런스가 없어져 마음이 편했지만, 피로감은 무겁게 온 몸을 짓눌러왔다. 하프 거리에서 딱 6km 더 왔을 뿐인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남은 16km 거리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걷기만도 못한 달리기를 이어가다가 결국 ‘걷다+뛰다’가 시작됐다. 얼마 안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얼마 안 걸은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걷기에서 뛰기로 바꿀 때는 온 몸을 두드려 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운동 강도가 떨어지니 체온도 함께 떨어졌다. 긴팔 셔츠에 하프타이츠를 입었는데 마치 망사팬티 하나만 걸친 것처럼 추웠다.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30km 급수대가 결국 시야에 들어왔다. 물컵이나 물병이 말끔하게 치워졌음은 물론이고, 이번에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테이블 위에 물병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물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했다. 몸 여기저기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스톱워치 모드로 맞춰놓은 손목시계를 봤다. 3시간 50분 30, 31, 32초… 5시간 내 완주가 불가능함을 알려주는 숫자들이 시시각각 액정에 찍히고 있었다.

1시간 10분 안에 12km 하고도 195m를 달리는 것. 평범한 러너들에게는 손쉬운 미션이겠으나 생애 첫 풀코스 대회 30km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는 나로서는 참으로 임파서블한 미션이었다. 앞으로 맛볼 고통이 두려웠고, 골인지에서 맛볼 쪽팔림도 못지않게 두려웠다. 하긴, 5시간마저 넘기면 남아있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슬로우 모션에 가까운 느린 동작으로 뛰었다. 남들이 보면 제자리 뛰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혹자는 뒤로 뛰는 것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멍한 표정으로 1km쯤 뛰었을까. 멀찍이 버스정류장 벤치가 보였다. 앉아 쉬기에 너무 완벽해 보이는 벤치였다. 벤치 앞에 다다르자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잠깐 앉기로 했다. 최고급 침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아.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오뉴월 아스팔트에 던져놓은 아이스크림처럼 온 몸뚱이가 사르르 녹고 있었다. 달콤하고 달콤하고 달콤하여라…….

앗!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지? 이 느낌은? 설마 내가 졸았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십오 분이 지나있었다. ‘맙소사!! 뛰다 말고 앉아서 졸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후닥닥 일어나서 다시 뛰었다. 지나다 나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앉아 졸다가 갑자기 마라톤을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요따위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싶었지만 나는 뛰어야 했다. 반드시 뛰어야만 했다.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냐고? 천만에, 십오 분이나 앉아 있었더니 몸뚱이가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33km 지점 못 미처 위치한 주유소에선 종업원이 일부러 도로까지 나와서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내가 물 좀 얻어먹자고 청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프리카 난민을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시원한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도망치듯 길을 재촉했다.

달리다가 걷다가 쉬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파죽지세로 텅 빈 도로를 달리다 보니 35km 지점에 이르렀다. 이번엔 테이블도 없이 차도와 인도 사이 분리턱에 생수병 하나와 바나나 하나가 놓여있었다. 먹을 걸 바닥에 놓고 간 게 한편으론 괘씸했지만, 그나마 한 명 남은 불쌍한 중생을 배려한 것을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차디찬 바나나는 약간 덜 익어 살캉거리긴 했지만 맛은 꿀맛이었다. 앉아서 잠시 먼산 바라보기를 하고 힘겹게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4시간 35분 경과. 제한시간 내 완주가 확실하게 물 건너가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선생님~ 이젠 타세요. 제한시간 넘기겠네 뭐.”
앰뷸런스였다. 어디 짱 박혀 있다 이제 나타났단 말인가. 30km 정도에서 나타나 줬으면 못이긴 체 하고 탔으련만.
“이제 와서 어쩌라구요. 그냥 가야지.”
“아 어느 세월에 갑니까. 담에 완주하시고 오늘은 타세요. 우리도 집에 좀 갑시다.”
“미안해요. 그래도 어떻게 지금 포기합니까. 이제부턴 안전하게 인도로 걸을 테니 먼저 가세요.”
간호사도 함께 탄 스텝도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그럼 뭐라도 먹으면서 뛰세요. 빵이랑 우유 있는데 드려요?”
“고맙지만 안 되겠어요. 아까 먹은 바나나랑 물이 아직도 위에서 출렁거려요.”
“…알았어요. 무리하지는 마세요.”

엠뷸런스가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첫 풀코스 완주라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듯 민폐를 끼쳐서야 되는가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부디 대회 관계자들이 공식 행사를 마치고, 도시락 하나씩 까먹고, 뒷정리를 마치기 전까지만 골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5시간 15분에 40km 지점을 지났다. 급수대 자리에 물이 놓여있지 않았지만 어차피 위에서 받아주지 않는 상태라 섭섭하지도 않았다.

목에 완주메달을 걸고 터덜터덜 걸어오던 이들이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곤 했다. 놀랍기도 하겠지. 아직도 골인 안 한 사람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어느새 내 다리가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물론 바라보는 쪽에선 아주 미세한 차이였을 것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꼴찌 러너의 라스트 스퍼트. 지극히 느린 속도로 뛰는데도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아테네 병사 필리피데스가 왜 제 발로 뛰다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

멀리 신기루처럼 결승아치가 보였다. 철거하기 위해 바람을 반쯤 뺀 에어아치. 인부들이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전원 스위치를 넣는 것이 보였다. 너무 미안했다. ‘아이고, 왜 바람을 다시 넣으시나. 그냥 옆으로 골인하면 되는데….’ 얼마간 더 뛰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에어아치 밑으로 골인했다. 시간은 5시간 30분 언저리엿던 것 같다. 몇몇 사람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는 게 싫어서 간식과 메달을 받아들고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갔다. 했다.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화장실 개수대 앞에 큰 거울이 있었다. 그 안에는 풀코스 완주메달을 목에 건 초췌한 모습의 남자 한 명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완결)